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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nogoodnw Jan 2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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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記

약속 장소로 휘적휘적 걷던 와중 익숙한 향이 코끝을 찔러, 휙 돌아보니 교보문고가 있었다. '여기에도 교보가 있었네.' 하고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 끝나고, 모임이 파한다음 그 익숙한 향이 생각 나 교보문고로 발길을 향했다.

무슨 책을 집어 들어볼까나, 하다가 글을 아주 잘 쓰는 사람에게 추천받았던 '한강'작가에 생각이 미쳤다. <채식주의자>가 대표작이었나, 읽어보자, 하고 검색대로 가서 검색해 보니 원래 서 있던 자리 바로 뒤편이 국내 소설 섹션이었다. 분명 눈길을 주었을 텐데 발견치 못한 나를 슬그머니 원망하고는 그 자리로 향했다. 다시 가보니, 양장의 파란 표지에 하얗고 얇은 글씨체의 '채식주의자' 글자가 세로로 쓰인 책 더미가 눈에 띄었다.


토요일 오후의 서점은 북적북적해서, 앉을자리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간신히 사람 사이를 비집고 앉아서, 책에 머리를 박고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간결한 문체에 쉬운 문장, 어두운 분위기의 글. 절반 좀 못 되게 읽으니 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교보문고는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10% 할인된 가격에 책을 살 수 있어서,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바로드림 서비스를 신청하고는 책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바로드림 서비스는 1시간이 소요된다니, 슬슬 출발하면 꼭 맞게 도착할 터였다. 바람이 좀 덜 불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과 함께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온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합정점보다도 훨씬 인구밀도가 높았다. 하지만 가득가득한 사람들의 다채로운 체취 화음도 교보문고 특유의 종이 향을 지울 수는 없었다. 합정점이랑은 또 조금 다른 광화문점의 향. 나에게 가장 익숙한 그 교보문고의 내음.


바로드림 서비스 이용은 처음이라, 책을 제대로 수령치 못하면 어쩌나 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목구비가 아주 오밀조밀 잘 생긴 남성분이 책을 가져다주셨다. 차가운 택배박스로만 책을 받던 터라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종종 사용해야겠다 하고는, 한 손에 그 파란 표지를 든 채 교보문고를 나섰다.

건너편의 스타벅스는 광화문 교보를 갈 때면 세트메뉴처럼 딸려오는 장소였다. 창 밖이 보이는 낮은 책상 자리에서 독서를 시작했었다. 그런데 웬 걸, 오늘은 만석이란다. 날이 추워서 그런가 토요일 오후의 스타벅스는 본래 자리 잡기가 어려운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오늘의 내겐 그 낮은 책상 자리의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별 수 없지. 옆의 할리스로 가자.


다행히 할리스 커피에는 자리가 꽤 있었다.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없어서, 콘센트 있는 자리에 가방을 던져두고는 키오스크로 가 따뜻한 캬라멜 마키아또를 주문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언제나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는데, 이상하게 요즘엔 무채색 향보단 달달한 향이 더 끌린다. 나이를 먹은 탓인가.


캬라멜 마키아또를 아슬아슬 들고 와서는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꼈다. 귀마개 대용이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글들, 가령 철학서나 인문서를 읽을 땐 백색소음을 틀지만, 소설은 꿀렁꿀렁 넘어오니 이어폰만 껴도 충분하다. 준비도 다 되었겠다, 책을 폈다. 책이 상하는 것이 싫어 아주 뾰족하게 책을 벌린다. 이런 양장 책은 책을 쫙 펴면 종이가 쉽게 울고 상한다. 이리저리 불편한 자세를 돌려가며 책을 보는데, 옆 자리 남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애매한 분위기가, 달달함과 무채색이 적절히 뒤섞인 분위기가 내 정신을 자꾸만 가져간다. 이게 아주 가까워 보이진 않는데, 그렇다고 격식 차릴 사이도 아닌 듯하다. 첫 번째 만남은 아닌 것 같고, 두 번째? 세 번째? 아주 진한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에 비해 코와 턱이 살짝 약하고 입이 조금 튀어나온 남자와, 눈도 동그랗고 얼굴도 전반적으로 동그란데 그에 비해 코가 살짝 뾰족한 여자의 만남이다.


남자는 여자가 맘에 든 듯 양 팔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있다. 여자도 남자가 그리 싫지만은 않은 듯, 자세가 꽤나 기울어있다. 주변 사람들을 의식한 듯 귀엣말도 건넨다. 궁금하다. 어떤 사이일까. 소개팅하세요? 보아하니 사귀는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오늘이 첫 번째 만나는 거 아니죠? 두 번째? 세 번째?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참아야 한다.


남녀가 곧 자리를 뜬다. 이 근처에는 디 타워도 있고, 음식점도 많으니 멋진 식사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 남녀의 만남이 몇 번째 만남인지 이지만, 그들은 내 물음에 답을 주지 않은 채 떠나갔다. 그래도 감사해야 한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다시 정신을 붙잡아다가 파란 책에 고정시켰다. 그것이 전부 고갈될 때 즈음,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책을 닫고 옆에서 보니 책이 하나도 울지 않고 새 책 같다. 기분이 새 책스러워졌다. 요 바로 옆에는 kfc가 있는데, 이벤트 메뉴로 배를 채우면 그 감정이 배가될 것이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를 읽고 치킨 냄새생각하는 내가 혐오스럽다. 배가 아파오는 듯하다.


그래, 오늘은 비운 채로 집에 가는 거다! 채식은 못하겠지만 저녁 정도는 굶을 수 있다. 하긴 주인공은 결국 채식을 하다 못해 금식으로 이르렀다. 기분이 새 책스러운 것으로 오늘은 만족이다. 책의 옆을 보고 종이가 울지 않았음을 한 번 더 확인하곤, 으로 나왔다. 겨울의 차가운, 그 정 많은 향이 내 코를 찔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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