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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nogoodnw Apr 05. 2023

D+11999

1분기 결산

일기 제목에 살아온 일 수를 적는 주제에 분기 결산을 한다는 것이 좀 웃긴 일이긴 하지만, 이리 보건 저리 보건 어차피 연속의 일부임은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복기는 분야를 막론하고 의미 있는 행동이니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90일이 그 대상으론 적격이다.

동생이 결혼을 했다. 어려서부터 동생과 원체 친하게 지내서 그런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동생의 결혼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별 거 있나? 아주아주 친한 친구 장가가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식 날도 마찬가지였고. 동생 내외가 부모님께 인사드릴 때엔 살짝 울컥하긴 했지만. 외려 결혼식 당일 힘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분명 난 별 일 안 했는데, 그 조금의 일 조차 귀찮아 엄마 아빠에게 동생이 하나만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여하튼, 동생이 남편과 즐겁게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동생이 결혼하고는 구로동으로 이사를 왔다. 어렸을 때 설레는 마음으로 지나치던 초록색 철문을 이제는 매일같이 드나들며 지내고 있다. 이사는 상상 이상으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힘들고 복잡한 일이었다. 최대한 이사 다니지 않는 것이 수임을 배웠다. 아직 내 방에는 풀지 않은 짐이 한가득이다. 아빠는 얼른 그것을 정리하라 말씀하시지만, 짐을 치우지 않아도 내가 생활하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어 솔직히 언제 치울 마음이 들진 모르겠다. 어쩌면 독립할 때 일지도. 아빠 미안.

책을 많이 읽었다. 23년 접어들며 다음의 세 가지 독서 목표를 세웠다. 1. 높이 100cm 분량 책 읽기 2. 도스토옙스키 5대 비극 읽기 3. 비트겐슈타인 플로우차트 내 서적(15권) 모두 읽기. 30cm 조금 넘게 읽었으니 이 페이스대로면 1년 100cm는 무난하다. 도스토옙스키 비극도 두 작품 읽었다. 비트겐슈타인 서적도 3권 읽었다. 다만 독서 대부분이 1월에 몰려있었고, 2,3월에는 독서량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2분기엔 좀 더 많은 시간을 독서에 투자해야 할 듯싶다.

책을 읽는 것은 애드-온을 머리에 붙이는 것과 비슷하다. 벌쳐만 생산할 수 있던 팩토리에 애드온을 붙이면 탱크도 생산할 수 있다. 어떤 생산체제를 갖출진 나도 가늠이 되지 않지만, 어쨌거나 내 머릿속 공장은 조금씩이나마 바뀌고 있다 믿는다. 그 변화 방향이 진보의 방향일지 퇴보의 방향일지는, 아마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나의 실천에 달려 있을 것.

살을 좀 뺐다. 작년에 운동을 쉬면서 몇 년 만에 체중이 80킬로를 넘었다. 얼굴이 포동포동해지고 몸 전체에 살이 붙었단 소리를 들었다. 무식한 나를 인지하는 일은 참을 수 있어도 살이 찐 나를 인지하는 일은 참을 수 없다. 항상 그래왔듯, 무식하게 운동을 해댔다.

덕분에, 동생 결혼식 때엔 그나마 볼 만은 하게, 물론 맞춤양복이니 내 노력보다야 재단한 분의 노력이 컸겠지만, 서 있을 수 있었고, 지금은 훨씬 더 마른 상태가 되었다. 조금 더 일찍 인지할 걸 그랬지만 뭐 아무렴. 아니, 돌이켜보니 인지는 했으나 간절함이 부족했다. 다만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지옥불에 발을 들여놓는 것보단 좀 더 나은 기분으로 헬스장에 들어서야겠다.

아주 오랜만에 열심히 LOL 솔로랭크를 돌렸다. 친구 하나가 게임에 늦바람이 들었길래, 반은 응원하는 마음으로, 반은 놀리는 마음으로 이러쿵저러쿵 조언 - 핀잔 혹은 인격 모독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 을 해댔다. 친구가 자꾸 토를 달기에 난 이 게임 잘했었다 말했더니, 골드 계급이라도 달성하고 잔소리하면 찍소리도 안 한다고 말해왔다. 몇 년을 안 했어도 골드정도는 발로도 찍는다 말하고는 내기를 수락했다.

몇 가지 놀란 점이 있었는데, 가장 놀란 것은 몇 년 전의 발조차 못 되는 내 손의 상태였다. 뇌와 손가락의 연결 체계가 끊어진 건지 내 입은 '아 분명 눌렀는데!'만 연발해 댔다. 뭐 우여곡절 끝에 시간을 꽤나 투자하여 골드는 달성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내기는 내가 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디 가서 '저는 고작 골드입니다' 말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비통하다. 내가 여기에 인생을 얼마나 많이 갈아 넣었는데. 하. 세월이 야속하단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었나 보다.

1분기는 참으로 다채로웠다. 형형색색의 시간이 지나갔다. 조금만 더 칠해졌으면 내 인생이 찢어졌을지 모르겠다. 역치의 부근을 맛본 시간이었다. 사실은 좀 피곤하다. 그래도 색뭉치가 예쁘게 칠해져 보는 맛이 있다. 이다음은 눈을 감고 좀 더 여유로웠으면 하지만, 신의 뜻이 있겠거니. 연속의 일부이니 무엇이든 즐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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