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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nogoodnw Jun 30. 2023

빈&파리 기록 - 2

0612

새벽 3시가 좀 넘어서 눈이 뜨였다. 잠자리에 예민한 편은 아닌데, 시차에는 혹시 예민했나?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해도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서, 잘 됐다, 하고는 100페이지 남은 책을 폈다. 6시 거진 다 되어서 책을 다 봤다. 찝찝한 마음이 사라졌다. 빈에서 프로이트의 서적을 완독 하다니! <꿈의 해석>은 도저히 무슨 말인지 감도 안 잡혔었는데, <정신분석 강의>는 그래도 좀 읽을만했다. 이 책을 먼저 읽었으면 아마 <꿈의 해석>도 조금은 읽을만했을 텐데. 한국 돌아가서 올해 안에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를 읽어봐야겠다, 하고는 돌아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자니 동기들이 하나 둘 일어났다. 오전부터 바삐 움직여야 해서, 얼른 씻고는 아침을 먹으러 밖을 나섰다.

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것을 해봐야 한다가 내 지론인지라, 여행도 거의 안 다녀본 게 여행에 대한 지론을 운운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아침으로는 꼭 오스트리아식으로 빵에 커피를 마셔야 했다. 7시 반쯤이었는데도, 꽤 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었다. 구글 지도를 켜놓고 이리저리 검색하다 보니 빵집이 하나 나와 그곳으로 들어갔다.


미천한 영어 실력 때문에 중간중간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 들었지만, 간신히 몇 종류의 빵과 melange라는 오스트리아 커피를 시킬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으니 빵과 커피를 갖다 주셨다. 커피는 따뜻한 카페라떼에 가까운 맛이었다. 뭐 대단히 특이한 맛이 나진 않았다. 빵이 외려 아주 맛있었다. 고급 빵집에서 파는 빵 맛이라고 해야 하나? 맛에 비하면 가격이 아주 착하게 느껴졌다. 잘라주시질 않아서 아침부터 그 딱딱한 빵에 열심히 힘써야 했지만 그럴 만한 보람이 있었다. 원래는 버터를 빵에 발라먹지 않는데, 오스트리아 버터 언제 먹어보나 하곤 버터도 발라 먹었다. 내가 버터 바르기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주 먹음직스럽게 펴 발라 동기들과 나눠 먹었다.


아침을 먹고 숙소로 돌아온 후, 조금 쉬었다가 OPEC HQ로 향했다. 어쨌거나 명목상 연수인만큼 무언가 활동이 필요했다. 동기 하나가 출국 전에 미리 연락을 해서 OPEC HQ 탐방 일정을 잡아 두었다. 1초, 1초가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지.


OPEC 건물은 빈의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도착해서 조금 앉아있으니 한 여성분이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로비로 나오셨다. 오 아주 운이 좋게도(물론 내 기준에서) 예정된 시간만큼 탐방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큰 세미나가 있는데 그 준비 때문에 너무 바쁘다나. 언젠가 tv에서 본 적 있을 법한 Conference Room에서 사진 몇 장 찍어놓고, 10~15분가량 간단한 설명을 듣고 나니 어느새 ‘It was my honor to meet you.’라고 말하고 있었다.

OPEC 건물서 나와 간 곳은 ‘프로이트 박물관’이었다. 첫 관광 일정을 프로이트 박물관으로 시작하다니, 난 신나긴 했는데, 동기들에게 좀 가혹했는지 모르겠다. 프로이트 박물관에는 그 할아버지가 당시에 썼던 진료실,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당장 아침에 <정신분석 강의>도 마무리했겠다, 신이 나서 가이드를 자청했다.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방문을 모두 마치곤 기념품 샵에 들려 할아버지 얼굴이 프린팅 되어 있는 에코백과 안경집을 샀다. 어렸을 땐 기념품 같은 건 대체 왜 사나 했었는데, 돈이란 게 벌어보니 참 좋긴 좋다.

피자를 점심으로 먹었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음식을 따지면 피자는 항상 손가락에 꼽혔는데(실제로 치킨보다는 피자 파다), 오스트리아는 피자&파스타가 유명한 지 도처에 피자 가게가 널려 있어 더욱 즐겁게 점심 먹을 곳을 고를 수 있었다. 평점이 높은 가게 한 군데를 갔다가, 예약했냐는 말에 깨갱하고는 다른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사람들이 인당 한 판씩 시켜놓고 먹길래, 우리도 3명이서 3판을 시켰다. 나는 치즈를 좋아해서 Quattro Formaggi(치즈 4종류가 들어간) 피자를 시켰다. 말 그대로 치지한 것이, 전 날 저녁에 먹은 슈니첼보다 23배쯤 맛있었다.

치즈 덩어리를 배 안에 가득 넣고선 빈 시내로 향했다. 목적지는 빈 미술사 박물관이었는데, 가는 길에 있는 빈 대학교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직접 다니진 않았지만 논리 실증주의로 유명한 빈 학파의 본거지였으니까 꼭 가봐야 했다. 그 유명한 괴델도 빈 학파였다. 그러니까 나는 괴델이 거닐던 캠퍼스에 서 있던 거야! 빈 대학교는 외국 영화에서 보던 대학교 그 자체였다. 캠퍼스도 아름답고, 건물에 빙 둘러져 있는 흉상들도 인상 깊었다. 아주 유명한 학자들의 이름도 볼 수 있었다.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기준에서, 괴델과 나는 같은 공기를 마신 거다.

조금 더 걸어가면 빈 미술사 박물관이 있었다. 자연사박물관과 쌍둥이 건물이어서 어디가 어디인지 좀 헷갈리긴 했지만 다행히 historic 정도는 알아보았다. 빈 미술사 박물관은 커도 너무 컸다. 처음엔 찬찬히 전시품들을 보다가, 도저히 이건 다 볼 수 없겠다 싶어 나중엔 쓱 보고 넘어가고를 반복했다. 빈에 다시 간다면 그땐 꼭 찬찬히 감상하고 싶다. 소금통이 유명하다고 해서 회화전시관을 보다가 다시 장식품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소금통 사진을 찍어왔다. 유명한 것은 그 이유가 있을 테니 남겨 와야지. 두 시간 반정도 봤는데, 하도 급하게 봐서 나중엔 머리가 아팠다.

그다음 목적지는 벨베데레 궁이었다. 벨베데레 궁은 미술사 박물관에서 걸어가기엔 꽤 멀리 있어서, 트램이라 불리는 시내버스를 탔다. 현금만 결제가 되는 줄 알고 잔돈 교환을 위해 길거리에 있는 노점상에서 콜라를 사 마셨는데 시원하지 않아 좀 슬펐다. 안 그래도 많이 걸은 데다가 해가 아주 쨍해서 꽤나 지쳐 있었는데, 콜라라도 시원했으면 힘이 되었으련만. 버스에 타보니 현금 결제는 되지도 않고 카드로만 결제가 되었다. 결제기가 고장이 났는지, 법카도 꽂아보고 개인카드도 꽂아봤지만 결제가 되질 않았다. 그 덕분에 마지막이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 무임승차를 할 수 있었다.


벨베데레 궁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 50분경이었는데, 궁 관람 시간이 6시까지였다. 마당이라 부르기엔 너무 광활하지만 어쨌든 궁 앞 길들을 걷고 올라와선 궁 안으로 들어갔다. 클림트와 그의 단짝인 에곤 쉴레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클림트의 작품은 사람을 압도하는 맛이 있었다. Flinched 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 얼굴만 엄청 묘사해 놓고 몸뚱이는 흐르듯이 그려놔서 그런가? 애당초 내가 클림트를 좋아해서 그리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키스(본 작품명 연인)>의 실물도 볼 수 있었다. 그저, 아름답다.

벨베데레 궁에서 나와 중앙 기차역으로 향했다. 동기 하나가 다음날 갈 할슈타트행 기차표를 미리 끊어놓자고 제안했다. ‘기차표를 왜 전날 끊어놓는 거지?’라고 언뜻 생각도 했지만, 사실은 나로선 도저히 생각 못할 이런 치밀함을 가지고 있는 동기가 부러웠다. 갑자기 해당 시간대 빈 중앙역 부근에서 마스터카드 결제가 되질 않아, 내일 오전에 와서 끊으면 돼! 하고는 숙소 근처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숙소 근처에 돌아와서는 슈테판 대성당에 갔다. 사실 전 날 밤에도 밖에서 잠깐 보긴 했었는데, 해가 떠 있을 때 보니 사뭇 그 웅장함이 더했다. 전 날 밤은 어두움에 가려 조금 으스스해 보였다면, 이 날 본 슈테판 대성당은 말 그대로 하늘 끝에 닿고 싶은 인간의 뾰족함이 눈에 아주 잘 들어왔다. 대성당 안에 들어가서는, 냉담자 주제에 일단 성호부터 긋고 보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생전 처음 보는 사이즈의 오르간이었다.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아주 조금 더 다양한 종류의 오르간들을 봤을 것 같은데, 이만한 사이즈는 정말 처음 봤다. 그 큰 성당 벽면이 오르간으로 가득하다니. 돈을 내고 입장한 첨탑에서는 빈 시내가 전부 내려다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고소공포증이 조금 있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긴 했다.

저녁으로는 Ribs of Vienna라는, 한국인에게 아주 유명하다는 빈 시내의 식당을 갔다. 오스트리아를 떠나기 전까지, 빈에서는 한국인을 가장 많이 본 곳이었다. 4인 가족 한 팀이 있었고, 커플 두 팀이 있었고, 남자 셋이서 상 넘치게 고기를 시켜놓고 뜯고 있는 우리가 있었다. 한국인들은 역시 미식가다. 고기가 진짜 맛있었다. 특히 스테이크가 맛있었는데,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는데도 우리나라로 치면 스테이크 전문점에서 파는 고기 맛이 났다. 단백질은 많이 먹어도 괜찮아하고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치웠다.

고기를 다 먹고선 Café Central이라는 카페에 갔다. 빈 3대 카페 중 하나라고 하는데, 베토벤, 슈베르트, 프로이트 등이 이 카페에 즐겨 왔었다고 한다. 심지어 히틀러도. 이왕 먹을 거 다 먹어봐야지, 하고는 디저트와 커피를 잔뜩 시켜 먹었다.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인정사정없이 퍼먹었다. 아마 내가 제일 많이 먹었던 것 같은데. 디저트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일단 배에 넣고 봤다. 특히 쇼콜라 케이크랑 땅콩 소스 발린 에끌레어(이 카페에서 명칭은 에끌레어가 아니었다)가 맛있었다. 우리나라 디저트 가게와 대단한 맛의 차이가 있냐,라고 하면 그것은 아니지만, 단 맛이 미묘하게 달랐던 것 같다.

이거 적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실제로 돌아다닌 그때의 나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야 보고 싶은 것 보고 가고 싶은 곳 가는 건데, 나랑 같이 다녀준 동기들은 어땠을까 싶다. 여하튼, 우리의 월요일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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