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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nogoodnw Jul 05. 2023

빈&파리 기록 - 3

0613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잠에서 깨버렸다. 애당초 한국에 있을 때도 잠을 충분히 못 잤는데, 오스트리아에선 시차 문제까지 겹쳐 더욱 잠이 부족해졌다. 하지만 피곤해도 몸을 움직여야 했다. 어제 분명 결제되지 않은 기차 티켓이 결제되었다는 문자가 동기 휴대폰에 와 있었다. 실물 티켓도 받지 못했는데, 졸지에 173유로만 날린 꼴이 되어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되도 않는 영어 문장들을 떠올리며 빈 중앙역으로 향했다.


전 날의 티켓 부스에 가서 다시 할슈타트행 기차표를 끊었다. 전 날엔 분명 티켓값이 173유로였는데, 당일에 끊으니 표 값이 180유로가 넘었다. 프리미엄이 붙나, 했지만 뭐 별 수 없지. 티켓 부스 근처를 둘러보니 은행처럼 생긴 OBB(오스트리아 철도 회사) 사무실이 있었다. 고객센터인가 싶어, 얼른 들어가선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았다.


아마 여행을 다녀온 직후의 나였다면, 완벽했던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오점으로 이 날 오전 우리를 담당했던 상담원을 꼽았을 것 같다. 어눌한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한결같이 ‘결제가 되지 않았을 거다.’라는 말 뿐이었다. 카드 번호를 입력하면 결제 여부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별다른 시도 없이 공허한 말만 되풀이해 대는 상담사에게 참으로 실망했었다. 뭐 별 수 있나. 상수함수는 변수와 무관하다. 소득 없이 밖으로 나와서, 이따 밤에 다시 와보자, 하고는 아침을 사러 갔다.


아침으로 파니니와 커피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빠진(오스트리아에 와서 처음 마신 차가운 커피였다) 일종의 아포가토를 사고는, 할슈타트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에는 6~8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칸이 여러 개 있었는데, 들어가서 바로 보이는 칸의 문을 여니 동양인 모녀가 몸집만 한 캐리어를 다리 사이에 끼고는 앉아있었다. 이 사람들 자리인가 보다, 하고는 다음 칸으로 이동하려 하는데, 어머니 쪽이 한국말로 여기에 앉으라고 말해왔다. 내 동기들은 다들 나보다 싹싹한 편이어서, 어이구 네 앉겠습니다, 하며 자리에 앉았다. 나야 뭐, 별생각 없이, 동기들이 앉았으니 문 옆에 자리를 잡곤, 가져온 <비트겐슈타인 평전>을 폈다.


6학년 때, 내게 피아노를 가르치시던 신부님을 따라 독일에 다녀온 적이 있다(슈니첼의 아련한 기억!). 신부님께서 여행을 다녀와선, 엄마에게 ‘얘는 다른 사람들 다 좋다, 좋다 하며 주변을 둘러볼 때 책에만 머리를 파묻고 있더라’ 하셨는데, 그 이후로 엄마는 옛 얘기를 할 때면 어김없이 저 얘기를 꺼냈다. 그게 문득 생각이 나서,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 밖도 보긴 했지만, 풀풀풀풀 집집집집집만 나와서, 그냥 책에 머리를 파묻었다.


3시간 반쯤 기차를 타니 할슈타트 역에 도착했다. 길가에 쪼끄마한 역 하나 띡하고 세워진,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기차역이었다. 사람들이 이동하는 곳으로 따라가보니, 할슈타트 마을로 들어가는 배를 탈 수 있는 선착장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국인들이 정말 많았다. 한국인 여성 일행 중 한 분이 우리에게 현금이 충분하면 혹시 돈 좀 바꿔줄 수 있겠냐,라고 물어왔는데, 그 뒤에 있던, 일행이 아닌 다른 한국인 여성 분이 ‘제가 바꿔드릴 테니 저랑 같이 다녀요’ 하며 말을 가로채서 새로운 일행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던 사이 배는 들어왔고, 그 많은 인원을 전부 태운 배는 호수를 가로질러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 내린 후 함께 기차를 탄 한국인 모녀와 ‘즐거운 여행 되세요’ 하는 인사를 나누곤, 점심을 먹을 식당을 찾았다. 오는 길에 얼핏 그 모녀가 얘기하는 것을 들으니, 할슈타트는 송어 구이가 유명한 듯했다. 송어는 슈베르트만 알고, 사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특산물이라 하니 안 먹어볼 수 없었다. 내린 곳 근처를 조금 돌아다녀보니, 할슈타트 호 바로 옆에 송어를 파는 레스토랑이 있어 얼른 들어갔다. 호수가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송어 구이를 주문하니, 금방 음식이 나왔다.

송어는 조기 정도 사이즈의 생선이었다. 뭐 특별할 것 없는, 응당 생선구이라면 이런 맛이지 하는 그런 맛의 생선이었다. 가시가 생각보다 많아서 먹는 게 좀 힘들었는데, 동기들은 아주 잘 발라먹었던 것을 보면, 그냥 내 요령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보통 조기 한 마리만 달랑 뜯어먹으면 배가 차지 않는데, 송어는 앞뒤로 살이 가득가득해서 그런지 다 먹고 나니 배가 꽤나 불러왔다. 바로 옆의 호숫가에 가서 손이나 한번 담가보고는, 마을로 발걸음을 향했다.


할슈타트 마을은 모든 곳이 포토존이었다. 호수만 배경으로 두면, 피사체와 관계없이 참 아름다운 사진이 나왔다. 물이 깨끗하다, 맑다, 이런 류의 흔한 생각이 아니라, 뭐라 해야 할까, 배경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어디서 찍어도 CG 배경에 나를 합성해 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기 하나가 사진사를 자청하며 가져온 디지털카메라로 우리들을 그 그림 안에 담아줬다.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서 마을 끝까지 걷다 보니, 소금광산과 해발 800m쯤 되는 스카이워크 전망대에 갈 수 있는 케이블카 정류장이 나왔다. 소금광산까지 다녀오기엔 시간이 조금 애매해서, 스카이워크 전망대만 다녀오기로 하곤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솔직히 말하면, 올라가는 길에 줄 끊어지진 않을까, 좀 걱정하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별 탈없이 맨 위에 도달했다. 내리자마자 연결된 소금광산 기념품샵을 지나니, 전망대로 가는 길이 있었다.


전망대 근처에는 한국인이 정말 많았다. 특히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많았는데, 보아하니 패키지로 다 같이 온 사람들로 보였다. 전망대는 말 그대로 스카이워크 그 자체였는데, 절벽 위에 인공구조물을 설치해서 전망대 끝 쪽에는 아래에 땅이 없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하, 진짜 무서웠는데, 그래도 사진은 하나 남겨야 하니까, 줄을 섰다. 전망대 위에서 찍은 사진 보면 소용도 없는 손잡이를 꼭 잡고 있다. 줄을 선 사이 젊은 사람들, 이젠 솔직히 젊다고 말할 수 있는 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 신기했는지 아주머니, 아저씨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아저씨 한 분께서는 본인의 인생사를 줄줄 설명하시면서, 얼마나 오래도록 일 해왔는지 자랑하셨다. 아, 네네, 하다 보니, 옆에 서 계시던 와이프분께서 이제 그만하라고 하셨다. 역시 와이프를 잘 만나야 해.

할슈타트 마을에서 할슈타트 역으로 가는 뱃시간이 조금 남아 카페에서 커피를 시켰다. 호텔 아래에 있는 커피숍이었는데, 다른 것보다 화장실이 공짜인 게 기억에 남는다. 마을 안의 화장실들은 전부 유료였는데, 아무리 관광으로 먹고살아도 이것들 진짜 독하다고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생리현상을 무기 삼아 돈을 벌다니. 화장실도 들렀다가, 하루 종일 마을 안을 걸어 다닌 다리를 좀 쉬게 하다 보니, 배가 왔다.


기차를 기다리다 보니, 앞에서 새로운 일행이 되었던 한국인 여자 일행이 보였다. 그 새 꽤나 친해졌는지, 오전에 봤을 때보다 더 시끌벅적했다. 그 일행 말고도, 우리와 같이 할슈타트 마을에 들어가는 배에 탔던 사람들도 꽤나 많이 보였다. 역시 사람이 생각하는 게 그게 그거지, 하며 사람들을 찬찬히 보다 보니, 어느새 기차가 도착했다.


집 가는 기차에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안 그래도 잠이 부족했는데, 며칠간 많이 걸어서 그런지 피로했나 보다. 기차에 타자마자 책을 피려던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곯아떨어져 버렸고, 잠을 깨고 나니 세 시간 정도 지나있었다. 정신 차려보니 빈 중앙역이었다.


빈 중앙역에 내려서, 오전에 들렀던 OBB 센터로 향했다. 밤 9시가 좀 넘어있었지만, 다행히도 아직 문이 열려있었다. 또다시 번호표를 받고 앉아 기다리니, 오전과는 다른 상담원과 대면할 수 있었다. 오전과 같은 말들, 그리고 알 수 없다는 같은 대답. 알고 보니, 이곳은 예약 관련된 업무를 진행하는 곳이었고, 결제 오류와 같은 일은 뒤 편의 고객 센터에서 따로 담당하고 있었다.


오전의 상담원이 그것을 알려줬다면 참으로 좋았겠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도 되도 않는 영어로 똑같은 말만 해대는 남자 3명이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여행을 다녀온 직후엔 원망스러웠어도, 지금은 뭐, 그럴만했으려니 싶다. 여하튼, 우리는 고객센터에 대한 정보를 얻은 채, 중앙역을 나왔다. 9시까지도 해가 지지 않아 훤하던 빈은, 고작 3~40분 지났다고 어느새 꽤나 어둑어둑했다.


저녁으로는 숙소 근처의 맥도날드를 먹었다. 첫 날 물을 구하지 못해 맥도날드에서 생수를 사면서, 동기들끼리 ‘빈까지 와서 맥도날드는 먹지 말자’ 했었는데, 도저히 10시 넘어 운영 중인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아쉬운대로, 한국에선 본 적 없는 제일 비싼 버거를 시켜 먹었다. 고기와 치즈 맛이 듬뿍 어우러지는 것이, ‘빈까지 와서 맥도날드는 먹지 말자’ 했던 생각을 없애주었다. 세트로 시켜 감자 튀김도 나왔는데, 한국 내 패스트푸드 프렌차이즈 중 최고인 맥도날드의 감자튀김 맛과 거의 차이가 없던 것 같다. 역시 패스트푸드는 틀릴 수가 없지. 노곤한 몸을 간신히 짊어 매고, 숙소에 들어가서는 몸뚱아리를 침대 위에, 쇼파 위에 내팽개쳤다. 그렇게, 빈의 마지막 날 밤이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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