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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nogoodnw Feb 12. 2021

재능충

언제부터 -충이라는 접미어가 인터넷을 강타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xx충이라는 말을 손쉽게 사용한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뉴스 기사에서마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 접미어는 대부분의 경우 대상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다. 대상의 특성에 '충'만 붙이면 누구나 화자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이 단어의 사용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지만, 언어의 영속성은 표기와 표현의 효율성에 좌우되니, 아마 이 접미어가 쉽사리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접미어가 유일(내가 아는 한은 유일하다)하게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되는 때가 있으니, '재능'이라는 단어 뒤에 붙을 때이다. 물론 재능충이라는 말도 가끔은 누군가의 노력을 폄하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완벽히 긍정적인 뉘앙스의 단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재능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으로 사용되기에, 본래의 용도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재능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이다. 특히 현실에서, 재능은 타고난, 선천적인 능력을 말하는 데에 주로 사용되니 재능충은 '특정 분야에 타고난 능력을 지닌 사람'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재능이라는 것이 모든 분야에 통용될 수 있는 단어이기에 재능충 역시 모든 분야에서 사용 가능할 테지만, 재능충이라는 말은 공부나 게임 등 특히 경쟁적인 분야에 국한되어 사용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재능충이라는 단어가 재능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이고, 부러움이란 감정은 대부분 경쟁 우위와 열위의 구분에서 비롯되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경쟁적 환경에서 재능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히 초기 인풋 대비 아웃풋이 높은 것을 재능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경쟁 속에서, 물론 사람마다 추구하는 바는 다를 수 있으나, 참여자의 목표는 다른 사람 대비 경쟁 우위에 서는 것이다. 경쟁 우위는 승리, 높은 등수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의 위에 서는 것이 경쟁 참여자의 최종 목적 함수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면 경쟁적 환경에서 재능이라 함은 다른 사람의 위에 서도록 하는 타고난 능력이 된다. 물론 초기 인풋 대비 아웃풋이 높은 사람이 단기적으로는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겠으나, 결국 우리는 모두 인간이기에 한계 실력의 체감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고, 참여자들 모두가 수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때가 오면 초기의 우위는 희석되어 그 존재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초기의 인풋 대비 높은 아웃풋은 재능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함이 있다.

진짜 재능은 무엇일까? 사람이 타고난, 경쟁의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에 참여자 간 열위와 우위를 가르는 요소는 무엇일까? 물론 이견이 있겠으나, 인생 대부분을 경쟁적 환경에서 보낸 내 경험으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침착한 대응능력'이 경쟁 상황에서의 진짜 재능이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농구와 같이 신체적 특성이 실력의 한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분야를 제외하면 인간의 최대 실력 값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는 아주 한정적이고, 아무리 간단한 일이라도 경쟁적 환경이 조성된 분야의 경우의 수는 인간 능력의 수용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으니 누구나 아주 집중적으로 한 분야에 시간을 투자하면 상위권, 아니 최상위권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재능은 비로소 이 순간 말을 하기 시작한다.

상위권 이상의 경쟁 참여자들은 누구나 좋은 실력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자신의 한계 실력이 0에 아주 가깝게 만들어놓은 사람들이다. 이 구간에서는 절대적 실력의 차이 역시 0에 근접하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쟁적이게 된다. 실력 외적 요소가 결과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고, 다른 사람의 개념을 망가뜨리기 위해 한 치 앞도 읽기 힘든 승부수들을 던지게 된다.  

사람은 제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있어 그 분야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개념)과 경쟁 우위에 서는 방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상위권으로 가면 갈수록 방법은 구체화되고 치밀해지며, 그들은 자신의 믿음이 담긴 무기를 맘껏 휘두르며 경쟁 우위를 점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사용자에게 편향을 발현시켜, 일정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로운 생각이 어렵도록 한다. 간단한 개념들이 복합 활용된 응용문제를 마주했을 때 이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거나, 상대방이 던진 승부수에 당황하여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은 굳이 내가 구체적 예시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상위권에서도 이러한 경쟁의 메커니즘을 이해한 최상위 포식자가 바로 '승부사'이다. 경쟁의 호흡 속에서 상대방의 호흡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통해 자기의 고유 무기를 아주 날카롭게 갈아낸 고수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승부사'들 중에서도 최강자는 바로 위에서 말한 '재능충'이다. 바둑기사 이창호 9단을 당대 최강으로 만든 것은 '신산'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최고의 끝내기 실력이었지만, 자신보다 끝내기가 뛰어난 후배들의 등장에도 그를 계속해서 최강으로 만든 것은 최강의 공격수들이 던지는 승부수들을 흐트러짐 없이 넘겨버리는 승부 호흡이었다. 프로게이머 이영호를 역대 최강의 게이머로 만든 것은 빠른 손도, 같은 빌드를 사용하더라도 남들보다 같은 시간에 일꾼이 2-3기씩 많은 괴물 같은 최적화도 아닌, 상대방의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당황하지 않고 대처하는 능력이었다. 만약 두 사람에게 이런 신이 내린 재능이 없었다면, 물론 한 시대를 제패한 '승부사'로 남았을지는 모르겠으나, '역대 최강'이라는 칭호가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재능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잘 정제된 경쟁 환경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일 수 있다. 사실 인간사 속 경쟁의 대부분은 '한정된 시간'이라는 요소를 배제하기 어렵기에, 처음에 흘리듯 말한 '초기 인풋 대비 아웃풋이 높은 것'을 재능으로 보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마주한 아주 긴 호흡의 정제된 경쟁이 있다. 바로 인생이다. 싫든 좋든, 특히나 자본주의 속에서, 결국 우리는 삶의 매 순간 누군가와 경쟁하고, 그 조각조각의 경쟁들이 모인 하나의 큰 경쟁 속에서 살아간다. 누군가는 상위권으로 올라가고, 그중에서도 누군가는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여 최상위권을 차지하며, 진정한 재능을 지닌 자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의 경쟁자는 모두가 인간이니까, 긴 호흡 속에서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 시간을 투자한다면, 누구나 상위권으로 올라갈 수 있다. 나보다 조금 빠르게 치고 나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재능충'이라고 치부하기엔 재능이란 단어가 너무 먼 곳에 있다. 당장 내가 어떤 분야라도 1등을 겨냥할 수 있는, 그러니까 나의 재능을 발현할 수 있는 최상위권에 있던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쉬이 답이 나올 것이다. 사실 재능이라는 것은 정말 대다수에겐 통용되지 않는, 환상과도 같은 단어이며, 진실로 중요한 것은, 내가 열심히 생각하고 분석하여 나만의 무기를 가질 정도로 노력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노력을 기울인다면, 당신은 인생이라는 경쟁 속에서 언제나 우위에 있는 사람이 될 것이며, 자신의 재능 여부를 시험해볼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여나 신이 당신을 선택했다면, 역사가 당신을 기억할만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p.s. 정말 슬프게도, 신은 나를 택하지 않은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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