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이 될게요, 행복하게 해 주세요.

가정폭력, 깊고 넓은 구덩이

by 가람

주변 친구들 덕분에 상대적으로 안온했던 중학교 3학년을 보냈다. 그런 시간이 계속될수록 행복했지만 한편으론 불안했다. 미술 전공을 위해 타 지역 예술고등학교 입학을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예술고에 불합격하지 않은 이상 겨우 찾은 소중한 인연들과 같은 고등학교를 입학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이 사람들 외에 이만큼 좋은 사람들을 찾지 못하리라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이런 마음을 애써 뒤로한 채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미술학원을 다녔다.


입학시험 준비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방학 때는 매일 13시간씩 수업이 있었다. 하루의 반 이상을 함께하다 보니 그들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합격하더라도 미술과는 한 반에 40명씩 총 2개의 반이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함께 생활할 사람들이었다. 그 3년이 괴롭지 않기 위해서라도 입시 때부터 잘 지내야 하는 존재였다. 안타깝게도 이들 사이에서도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여러 그룹으로 나뉜 아이들 중 가장 큰 무리에 속하긴 했다. 존재감 없이. 점심과 저녁을 먹으러 이동할 때 내가 자리를 비웠어도 찾지 않았다. 내 부재를 알지 못한 채 그들끼리 밥을 먹으러 가있는 상황이 종종 생겼다. 그럴 때면 뒤늦게 그들에게 연락해 위치를 물어봐 합류하곤 했다.


"너, 옷 참 예쁘게 입는다."

어느 날 그 무리의 중심 측에 있는 한 친구가 다른 친구 두 명까지 데려와선 던진 말이었다. 한껏 내 위아래를 흘겨보곤 사라졌다. 들어보니 그 친구는 내 패션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단다. 치마 안에 스타킹이 아닌 스키니진을 입은 패션이 문제였다. 아빠에게 당한 폭력의 흔적을 가리고자 바지를 입던 습관이 있었다. 스타킹이 익숙하지도 않았다. 겨울이라 추워서 별생각 없이 입은 스키니진이 그 친구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옷을 고를 때마다 그 친구의 눈치가 보였다. 그 뒤론 바지만 입고 다녔다. 어쩌다 흰 바지를 입고 갔더니

"참 용감하다. 보통 흰 바지는 쉽게 못 입는데."

라며 또다시 다른 친구 두 명을 데려와 날 흘겨봤다. 그쯤 되니 그 친구는 그냥 내가 싫은 것 같았다. 풀이 죽은 채 그 친구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다. 학교와 학원에서의 안정성이 차이가 커질수록 더욱 중학교 졸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과 앞으로의 3년을 함께할 수도 있다 하니 절망스러웠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친구와 함께 왔던 다른 친구 한 명이 내게 진심으로 옷을 잘 입는다고 생각했다며 그땐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이 친구도 초등학교 때 그룹의 중심 측 친구에게 밉보이지 않으려 했던 친구들과 같은 마음이었겠구나 싶었다. 이 세상은 눈치를 많이 봐야 하는 곳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예술고등학교 재학생 시절

1년의 입시 끝에 예술고등학교에 합격을 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분위기가 달랐다. 물론 친구들의 그룹이 나눠졌지만 선생님들은

"스스로를 왕따 시켜라. 그래야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라며 노는 분위기를 지양하고 서로가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지도하셨다.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이 편했다. 혼자 지내도 될 굳건한 핑계가 생겼다. 마음속엔 혼자 다니는 것에 불안과 공포가 여전히 요동쳤지만, 마치 대학 입시만에 푹 빠진 모범생인양 행동할 수 있었다. 성적도 내신과 모의고사 모두 항상 최상위권이었다. 학교에서도 최상위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 전형 입시반을 진행해 준 덕에 더 편히 모범생 타이틀 속 불안감을 숨길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 혼자 공부를 해도 불안하지 않았다. 난 그저 착실한 모범생이었으니까. 스스로를 왕따 시킨 채 입시만 집중한 모범생이었으니까. 그렇게 지내다 보니 주변엔 쉬는 시간과 식사시간을 쪼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선생님들께 예쁨을 받았다. 그를 질투한 친구들도 생겼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친구들에겐 애정을 받기 어려웠으니까. 선생님들께 관심을 받는 일에 집중했다. 선생님들 앞에서 좀 더 열심히 공부하고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들이 좋아하시는 착한 아이가 되면 대학교에 합격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았다.


조금 더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 학교 수업을 마친 뒤 대치동으로 학원을 다녔다. 수원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선 영어 듣기 평가를 듣고 EBS 수능 특강을 풀었다. 집에 도착해선 새벽까지 과외 수업을 받았다. 과외가 끝나면 독서실에 가 공부를 했다. 3년 내내 매일 새벽 3시가 넘어 잠들고 새벽 6시에 기상을 했다. 피곤한 일상을 보내다 조금이라도 아빠에게 긴장을 푼 채 행동하면 곧바로 폭력이 시작되었다. 녹초가 된 채 귀가해 간식을 먹는데 고분고분히 대답을 하지 않는다며 간식을 먹던 채로 맞는 날이 허다했다. 그럴수록 하루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이 집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서울의 대학을 가 기숙사에 들어가고 싶었다. 주변에서 연애와 담배, 음주를 시작한 친구들을 보곤 우월감을 가졌다. 그들보다 내가 더 착한 아이가 되면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 굳게 믿었다. 외로운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가진 믿음이었다. 대학에 가면 내 인생은 달라질 것이라며 나 스스로를 달랬다.


입시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따라야 함을 고등학교 3학년 첫 입시땐 몰랐다. 특히나 당시 예체능의 수시 경쟁률은 100:1 안팎이었던 만큼 운도 실력이었다. 연애와 음주를 하던, 우월감의 대상이었던 한 친구가 수시전형으로 가장 첫 번째 대학 합격자가 됐다. 내신과 모의고사 모두 나보다 한참 좋지 않던 친구였다. 수시전형 지원을 한 모든 학교에서 예비번호를 받고 불합격 한 나는 억울했다.

'선생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착한 모범생이면 성공할 수 있는 것 아니었어요?'

그 우월감에 큰 깨우침이라도 주듯, 나보다 성적이 안 좋고 더 많이 놀던 친구들의 합격 소식이 우후죽순 들려왔다.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정시전형을 준비했다.


입시 막판엔 서울 미술학원 근처 고시텔을 구해 자취를 했다. 새벽에 등원을 한 뒤 새벽에 하원을 하는 스케줄에 수원 집까지 통학하기엔 무리였다. 만 18살 인생 중 가장 외로운 기간이었다. 한가운데 서서 팔을 쭉 편채 한 바퀴를 돌면 벽 전체가 만져지던 아주 작은 고시텔. 옆 방에서 종이컵에 물 따르는 소리까지 다 들리던 판잣집 같은 공간. 아침에 아무도 없는 고시텔에서 옆 방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진동 알람으로 눈을 떴다. 항상 똑같은 메뉴 새우 냉동 볶음밥을 데워 먹었다. 맛없고 퍽퍽하지만 입에 빠듯이 채워 넣고 서둘러 학원으로 향했다. 하루종일 말 한마디 안 한 채 그림만 그리는 날이 쌓여갔다. 이전 따돌림을 당한 시절엔 집에 가면 가족들이라도 있었는데, 자취를 할 땐 밥도 혼자 먹고 고시텔에 가도 혼자였다. 밥 먹을 때, 고시텔에 있을 때 혼자인 것이 특히 잘 느껴져 밥을 잘 먹지 않았다. 엄마가 가끔씩 서울로 와 밥을 먹어주기도 했지만, 그런 날 밤이면 더 커진 외로움에 숨 쉴 수 없을 정도여서 그마저도 지양했다. 그와 함께 입시의 불안감과 스트레스, 우울함, 외로움이 겹쳐 위경련이 자주 왔다. 그때마다 수시전형에 합격한 친구들이 자꾸 생각났지만, 더 좋은 학교를 가면 된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고등학교 2학년 미술전시


불행하게도 정시전형에서도 전부 예비번호만을 받은 채 재수를 하게 됐다. 말이 안 됐다. 친구들도 포기한 채 입시만 매달렸는데. 선생님들께 예쁨 받는 모범생이었는데. 이런 내가 재수를 하고 성적이 훨씬 낮고 훨씬 많이 놀던 친구들이 대학생이 된다니. 충격에 빠져있는 나날을 보냈다. 담임선생님께선 합격 소식이 없는 학생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재수를 한다고 말씀드렸고 너무 충격적이어서 졸업식은 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후에 들은 바로는 졸업식에 나만 유일하 참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재수의 기간 내내 고등학교 친구들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학교에서 많은 기대를 받았기에 내 입시 결과를 많이들 궁금해했다. 기대가 컸던 것은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학교 발표 날, 재수가 확정됐고 엄마의 눈물을 처음 봤다. 재수의 기간 내내 잠에서 깨면 재수생인 현실이 떠올랐다. 특히나 '고등학교에도 대학교에도 소속이 없는 나'인 것이 미칠 것 같았다. 불안정 애착의 난 사람에게만 소속감의 갈증을 느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싫었다. 이대로 평생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집안 분위기는 언제나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웃어도 즐겁지 않은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수원 집에서 서울로 하루에 평균 3개의 학원을 다녔다. 고시텔에서 자취를 하며 외로움에 스스로를 갉아먹던 경험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수원과 서울을 통원했다. 엄마는 집을 나설 때 항상 저녁 도시락을 싸줬다. 마지막 학원에 도착해서 먹는 도시락은 언제나 국이 조금 새어있었고, 밥은 식어 맛이 없었다. 연료를 주입하듯 먹기 싫은 음식이어도 엄마의 마음을 먹듯 먹었다. 밥을 먹으며 문득문득 현실에 대해 생각이 들 때면 울면서 밥을 먹었다. 초, 중학교 때 따돌림으로 인해 울면서 밥을 먹은 적이 많아 최대한 식사땐 울지 않으려 하지만, 자꾸 눈물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밥을 먹고 지내는 것에 위안을 느꼈다. 이렇게라도 엄마와 연결되어 있음을 되뇌면 덜 외로웠다.


성인이 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나처럼 재수를 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중엔 나 만큼 인생을 실패한 듯 절망을 느낀 사람은 거의 없음을 알게 됐다. 왜일까? 수년동안 궁금해했다. 그들은 입시에 실패했어도 기대어 쉴 온전한 가정이 있었다. 그에 반해 난 가정에서 안정감을 얻기는커녕, 입시와 재수 기간 내내 아빠의 언어와 육체, 정신적 폭력은 끊이질 않았다. 간절히 아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착한 모범생이 돼 입시에 사활을 걸었지만 철저히 배신을 당했다고 느꼈다.


'나도 기대에 쉴 수 있는 존재가 있었더라면 어린 나이부터 삶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럽진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란 생각을 한 시절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 끝없이 억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언제까지 자기 신세를 한탄만 하며 살 순 없었다. 내 삶을 더 살만하고 빛나게 만들고 싶었다. 부모에게 안정성을 받지 못했음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그들에게 사랑을 배워야 했던 기간은 십여 년 정도의 세월이었다. 나머지 내가 살아갈 인생은 그 시간의 몇 배는 된다. 십여 년의 세월을 억울해하는데 훨씬 많은 세월을 바치고 싶지 않아 졌다. 그들이 내 온전한 편이 아니어서 힘들다면, 내가 내 편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하고 보호했다. 스스로가 내 편이라면 평생 내 편과 헤어질 일 두려움도 해결할 수 있다. 남들에겐 없는 결핍이 있어 억울했던 시절이 있다. 지금은 이런 결핍이 성장의 발판이 됐음을 느낀다. 더 깊고 단단한 내면을 가지게 해 줬다. 그 힘이 나를 세우고, 남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나눌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이전 04화중학생 시절 따돌림 속 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