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생존자의 절박한 자애
얼마 전, 몇 달 만에 부모님과 동생이 살고 있는 집에 갔다. 처음 보는 고무공과 커다란 종이비행기가 생겼다. 벽에는 엄마와 동생이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들이 늘었다.
엄마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얼굴과 목소리로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지난주에 셋이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데! 잔디에 누가 버리고 간 고무공이 있는 거야! 진짜 웃긴 게 애가 뻥하고 차도 날아가다가 픽 하고 떨어졌어. 어디로 날아갈지 전혀 모르겠더라고. 셋이 어찌나 깔깔거리고 놀았는지. 다 놀고선 그 공을 두고 왔어. 알고 보니 밤에 셋 다 그 공을 너무 그리워했더라고. 다음날 잔디로 다시 가봤는데 글쎄 공이 없어진 거야. 그래서 우리가 새로 공을 사 와서 한참 놀고 왔지 뭐야."
나도 함께 따라 웃는다. 슬퍼도 웃는다. 나도 당신들과 그렇게 행복하기만 하고 싶었는데.
"누가 봐도 달력 찢어서 만든 저 종이비행기는 뭐야"
물었다. 갑자기 동생과 아빠가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아빠는
"야야 이게 진짜 엄청 잘 난다? 얘랑 둘이 한 시간 반동안 거실에서 비행기 날렸어!"
라며, 신이 난 둘은 어떻게 종이비행기를 가지고 놀았는지 재연했다.
소파엔 책 '우리 아빠가 최고야(앤서니 브라운)'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엔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윤여림)'가 놓여있었다. 동생이 아빠와 엄마에게 사준 책이었다. 동생 방엔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로버트 먼치)'가 놓여 있었다. 엄마가 서점에 갔다가 동생 생각이 나서 사다 줬다고 했다. (이 책에 얽힌 이야기도 차차 풀어보겠다.) 서로를 사랑하는 책 선물을 하는 가족이라니, 낯설었다. 내가 살아온 집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 집은 방문할 때마다 슬픈 질투가 일어난다. 언제나 내게만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가한 아빠. 이 집의 모든 문제는 내 탓이라던 아빠. 그들의 요즘 모습을 보면 내가 문제가 맞다고 반증하듯 했다. 어느 시점엔 내가 모난 사람일까 생각이 들었다. 내 잘못들이, 화목하기만 할 수 있던 가족들을 괴롭게 했던 걸까 싶어졌다.
끝도 없는 자기 비하에 빠지기 직전, 가족 밖의 인연들에 시선이 갔다. 가족들을 향해 좁혀놨던 시야를 넓혔다. 집 밖엔 내 편 따위는 없다던, 사람들은 내 상처를 약점 삼아 날 괴롭힐 거라던 엄마의 말과 달리 날 사랑해 주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존재만으로 힘이 되어주는 사람', '선한 영향력을 내뿜는 사람'이란 극찬까지 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이내 가족 외 사람들이 오히려 내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날 가장 위할 사람이 가족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했다. 혈연을 지우고서,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디서도 가정폭력을 얘기하지 말라던 엄마의 말을 거역했다. 사람들에게 내 상처를 드러냈다. 가족들은 모른 체 해온 내 상처에 집 밖의 사람들은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주었다. 함께 했을 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지는 사람들과 진심을 나눌수록 지옥만 같던 세상이 조금씩 살만해졌다.
아픔들을 타인에게 꺼내 보이며 스스로의 흉터를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지는 방법을 배웠다. 그럴수록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들도 예전의 나처럼 아픔을 타인에게 꺼내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다양한 생존자들의 시간이 과거 트라우마 당시에 멈춰있었다. 나와 같이 그들의 마음속 어린아이가 그 시간에 묶여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울고 있었다. 첫 번째의 글을 발행하며 지인들에게 많은 응원의 연락을 받았다. 그중 일부는 본인도 생존자임을 말하며
"우리의 존재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자. 버텨주어 고맙다."
란 간결하지만 단단한 응원을 나눴다.
타인에게 꺼내 보이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되었기에 나 또한 그들에게 위안이 돼 주고 싶었다. 트라우마를 꺼내 보이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함을 잘 안다. 때문에 오늘도 가정폭력 생존자임을 나부터 담담히 밝힌다. 혹여 이러한 모습들에 용기를 얻어 나와 같은 생존자들이 마음 편히 아픔을 바라보는 것을 시작할 수 있진 않을까 하여. 나로 인해 시작된 이 작은 위안들이 모여 나비효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엄마가 말한 '상처는 약점으로 치부될 것 같은 사회'가 바뀔 수도 있다. 흉터를 약점이 아닌 흉터로 온전히 바라보고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도 있다. 그렇게 생존자들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