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생존자의 절박한 자애
"내가 계부냐? 미친놈이냐? 대체 언제 그랬다는 거야. 짜증 나게 하지 마. 난 너랑 말할 때마다 열받아."
이 날은 두 가지로 큰 의미를 가진 날이다. 첫 번째는 내가 아빠를 포기한 순간인 날. 두 번째는 엄마의 포지션이 달라진 날.
대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한창 아빠와의 관계 회복을 꿈꾸던 시기였다. 아빠에게 진실한 사과를 받고 앞으론 어떠한 폭력을 가하지 않음을 약속받고 싶었다.
"아빠, 나 중학생 때 부산 여행 갈 때 분무기 챙긴다고 했다가 혼난 날 기억해? 그때 내 머리는 단발이어서 아침마다 분무기로 머리를 눌렀었거든. 아빤 분무기를 쓰질 않던 사람이라 분무기를 챙기겠다는 이유를 몰랐어. 그래서 내게 그걸 왜 가져갈 거냐 물어봤는데, 그 말투가 혼내는 말투여서 난 겁을 먹었어. 분무기를 챙기고 싶은 이유를 말하는 대신 '그냥 안 가져갈게.'라 했었지. 아빠는 이유를 말하지 않는 내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고 욱했대. 분무기를 들고 내 머리를 내리쳤어. 분무기는 산산조각이 났고 난 그걸 손으로 막느라 손에 상처가 났었어."
아빠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의 말들을 쏟아내며 불같이 화를 냈다. 기억이 나질 않는댔다.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아빠한테 사과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지만 한번 더 상처를 받을 뿐이었다.
그 상황을 지켜본 엄마와 둘만 있을 때 얘기했다.
"아니 아빠는 뭐가 저렇게 당당하고 뻔뻔해? 기억이 안 난다면서 자기가 그런 적 없다고 단언하는 건 또 뭐야? 분명 기억하는 게 있을 거야. 자기도 켕기니까 저렇게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거야."
엄마는 내 편을 들어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넌 뭘 또 그렇게 다 기억을 하고 있냐? 진짜 뒤끝 있다 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좀 잊어라 잊어!"
라고 말하는 엄마를 보고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엄마도 나와 같은 피해자라고 생각해 왔다. 사실은 엄마도 방관으로 내게 가해 중이었다니. 이를 처음 직면했다. 그제야 생각해 보니 아빠는 내게만 폭력을 휘둘렀다. 엄마나 동생에게 손찌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는 나처럼 불행하지 않았다. 나보다 작고 여린 엄마가 안쓰러웠고 지켜주고 싶었는데. 내가 괴로운 만큼 엄마도 괴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가 행복하길 바랐다. 심지어 중학생 때는 엄마가 다른 사람과 바람이 나길 바랐다. 아빠를 버리고 그 사람과 재혼을 해 행복하길 바란다는 일기를 쓴 적도 있다.
아빠에게 사과를 요구한 날 전까진 아빠의 폭력에 반항할 줄 모르고 살아왔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이 집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안정성이 깨졌다고 느낀 것 같다. 아빠가 날뛰어도 난 순응하길 바란 모양이었다. 나만 조용하면 되는, 그것이 엄마가 생각하는 가정의 평화였을 테니까. 아빠에게 맞서면 둘 중 하나가 집을 나가기 전 까진 전쟁일뿐이었으니까. 가해자 아빠, 이에 얌전히 지내길 바라던 엄마. 엄마는 나 스스로를 무능하다 여기고 반항하지 못하도록 유도해 왔다. 그럼에도 내가 사과를 요구하니, 가스라이팅이 이젠 잘 먹히지 않는구나 싶었나 보다. 그날 이후 엄마의 가스라이팅이 더 심해졌다. 억울해하는 내 마음을 바라봐주긴 커녕, 아빠를 거역하기엔 경제적 능력과 정신력이 없음을 세뇌했다. 이 집을 나가서 살면 개고생일 뿐이라고. 이전처럼 순응하고 아빠에게 애교나 부리며 얌전히 살도록 강요를 했다. 그럴수록 엄마를 향한 배신감이 커졌다. 난 당신의 행복을 바라며 살아왔는데. 당신은 이 폭력을 방관하고 내 자존감을 갉아먹고 있었구나.
아이러니하게도 난 아직도 엄마를 정말 사랑한다. 엄마에게 잘 보이고 싶다.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다. 아직도. 가스라이팅은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진행된다. 때문에 피해자 대부분은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는 피해자의 자존감과 판단능력을 잃게 만든다. 이러한 과정에서 피해자는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정신력이 약해진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더욱 의존하게 된다. 엄마 또한 내게 그랬다. 날 위해 해주는 얘기니 들으라며. 세상엔 내 편이 없다고 했다. 남들에게 내 아픔을 숨기고 살랬다. 아빠의 폭력은 그저 훈육과 체벌이지, 가정 폭력이 아니랬다. 엄마의 가스라이팅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엄마의 말들을 들을수록 스스로를 긍정하기 어려워졌다. 자책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부정적인 사고가 당연해졌다. 이를 엄마에게 알렸다. 엄마의 가스라이팅이 힘들다고. 그만 멈춰달라고.
"난 아빠나 내가 너한테 그랬었나 기억도 안 나. 너랑은 말이 안 통해. 너랑 동생은 다른 딸이야. 넌 너무 예민해서 불편해. 동생한텐 마음 편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넌 어떻게 생각할지 한번 거르고 얘길 해야 해. 너랑은 그냥 문자나 편지로 얘기하는 게 더 나아. 그리고 이렇게 잘잘못을 따지는 말들도 잘못됐다고 봐. 감히 엄마한테."
이런 잔인한 말들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엔 정말 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싶어 진다. 모든 게 내 상상인 것은 아닌지. 어릴 적부터 써온 일기들을 읽어봤다. 내 기억을 반증하 듯, 그날의 기록들은 빛이 바랬지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기억들을 나 마저 외면한다면. 평생을 외면만 받아온 상처투성이의 내 기억들은 기억해 주는 사람 하나 없어진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내 자존감과 판단능력을 잃게 만들었다. 혼자 카페라도 가는 날엔 뭘 먹어야 할 질 몰랐다. 메뉴판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뭘 먹을지 문자로 물어보는 지경이 됐다.
이를 심리상담 때 다뤄봤다. 상담사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본인을 이토록 오랫동안 힘들게 해온 사람을 왜 아직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아주 오랫동안 궁금했던 문제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대답했다.
"엄마도 피해자라 착각했어서 엄마를 위하던 마음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또는 엄마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해 엄마를 의존, 집착하는 것이 엄마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눈물이 흘렀다. 매주 진행한 상담이었지만 단 하루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당한 정신적, 언어적, 육체적 폭력들에도 왜 그들을 보고 싶어 하고 사랑하는지. 왜 오랜만에 만날 때마다 반갑고 헤어질 때마다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워하는지. 그들이 날 사랑으로 봐주질 않아 괴롭고 외로우면서도, 이들을 떠날 생각을 하진 않는 것인지.
"엄마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세상에 당신 외엔 절 사랑하고 위하는 사람이 없다고 세뇌시켰거든요. 근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엄마는 절 사랑해야 했는데 엄마도 절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럼 엄마 외 사람들이 절 사랑할 수도 있다는 말이더라고요. 이를 깨닫게 된 지 2년밖에 되질 않았어요. 그때부터 세상밖에 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어요. 그들의 악행을 이르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파왔던 사랑을 사람들로부터 채우고 싶었어요."
"...근데 자꾸만 마음이 아파요. 내가 살고 싶어서 얘길 시작한 건데. 자꾸만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에 먹칠한다고 생각돼요. 너무나 미운 사람들인데. 저는 왜 그들을 사랑하는 걸까요."
아빠와 엄마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길 요구했다. 결과는 처참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가짓수 중 하나를 줄일 수 있었다. 마음은 아팠지만 그들에 대한 마음을 접을 이유를 확인했다. 스스로를 치유해야 함을 직면했다. 나를 살리기 위해 그들의 악행을 이 세상에 공개한다. 그럼에도 자꾸만 마음이 아프다. 아빠에 관한 글을 쓰는 도중, 몇 달 만에 아빠에게 안부 전화가 왔다. 굉장히 뜨끔했다. 난 아빠를 세상에 이르는 중이었는데. 통화를 종료하자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가 향해야 할 길이 이곳임을 너무나 잘 알지만. 나도 그들과 행복하게만 지내고 싶었던 마음들이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죄책감을 조용히 감싸 안는다. 이미 그들에게 손을 내밀만큼 내밀었다며 다독인다. 나를 살리는 것이 우선임을 되짚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