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뤄낸, 이뤄낼 것들

가정폭력 생존자의 절박한 자애

by 가람

아빠에게 사과를 거절당한 날 밤. 자기 위해 누웠지만 그간 악몽처럼 따라다녔던 기억들이 쏟아져내렸다. 이 모든 기억들을 당사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사과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기억을 하고 있다.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생생한데. 쏟아지는 기억들을 메모장에 받아 적었다. 그 당시 활발히 사용하던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 그 내용들을 올렸다. 많은 학우들이 응원과 연대를 보내줬다. 언젠간 이 생존기를 꼭 출간해달란 댓글들도 달렸다.

'내가 무슨 책이야. 출간하고 싶긴 하다. 이 기억들은 이미 충분히 고독해왔어. 이대로 세상에서 지워지게 둘 순 없어.'

희미한 언젠가를 기약하며 가슴속에 묻어둔 꿈을 잠시 잊고 살았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전의 난 아빠에게서 물리적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일을 그만두고 싶었고. 내일이 기대되는 하루를 살고 싶었다. 미래의 내게 그 세상은 살만한지 묻고 싶었다. 그때의 내게 얘기해주고 싶다. 내가 되고 싶어 했던 사람이 거의 됐다고. 아빠와 따로 살고, 일도 그만뒀다. 요즘엔 잠이 드는 게 아쉽다. 현실이 정말 즐겁다. 잠이 들며

'빨리 내일이 되면 좋겠다. 내일이 기대돼.'

생각을 하며 잠들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살만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한 요즘을 보내다가, 잊고 지내던 출간의 꿈이 기억났다. 이전과 똑같이 걱정이 앞섰다. 글을 다루는 직업을 가져본 적은커녕, 평소 개인적인 글을 써보지도 않았다. 과연 내가 글을 써도 되는 걸까? 트라우마를 세상에 공개하는 것도 겁이 났다. 스스로에게 트라우마를 마주 보고 꺼내는 것을 겁내지 않도록 다독여왔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일까?


이전의 나와 달랐던 점은 나와 같은 생존자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먼저 날 가두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만 가능했다. 이를 생각하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더 이상 겁나지 않았다. 브런치 스토리에 작가신청을 했다. 기성 작가분들도 몇 번씩 탈락하는 작가신청이었다. 때문에 글 한번 써보지 않은 내가 한 번에 합격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몇 번이 될지 모를 불합격이 이어지더라도 내가 포기하지 않길 바랐다. 작가가 꼭 돼야만 했다. 내 이야기를 시작해야 했다. 배수의 진이 필요했다. 작가 신청과 동시에 브런치 작가 명함을 만들었다. 명함엔 회원가입 시 연재는 못하더라도 주어지는 프로필 url주소까지 QR코드로 입력해 뒀다. 명함 배송이 시작되기도 전에 작가 1차 탈락 연락이 왔다. 기죽지 않고 즉시 2차 지원 신청을 했다. 명함 배송이 온 날 2차 탈락 연락이 왔다. 기다렸다는 듯 3차 지원 신청을 했다. 사람들에게 명함을 나눠주며 얘기했다.

"전 꼭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기우제처럼 브런치 작가에 합격할 때까지 도전할 거예요. 제가 포기하지 않길 바라요. 때문에 여러분께 이미 브런치 작가가 된 양, 이 브런치 작가 명함을 드릴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 QR코드로 종종 제 작가 합격 현황을 지켜볼 것이라고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전 브런치 작가가 될 거거든요."


스스로를 살리는 기간 동안 저 마지막 말처럼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우는 말들을 참 많이 해줘 왔다.

수용하고 싶은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것이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이를 내가 행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활용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나는 결국 행복해질 것이다. 나는 결국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엄마에게서부터 정신적인 독립을 해낼 것이다.'

오래 돌아와야 했지만 결국 이뤄냈다. 스스로를 긍정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지만. 천천히라도 이뤄낸 안정감이 쌓여갈수록 스스로를 긍정하는 힘이 생겨났다. 브런치 작가가 될 것이라고 말한 그다음 주. 4차 도전에 작가 합격 연락을 받았다. 누군가에겐 큰 힘 들이지 않고 넘을 수 있는 문이겠지만. 내겐 수 없이 고민하고 좌절하며 넘은 문턱들 끝에 만난 세상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더 많은 치유를 해 보란 기회가 주어졌다. 그동안 절박하리만큼 안온한 삶을 갈구하며 자애를 쏟아왔으니. 그동안 쌓고 받아온 사랑을 퍼트려보란 것이다. 오늘도 나의 공간에 글을 채우며 앞으로 이뤄낼 내 모습에 대해 생각한다.

'옛 기억을 꺼내도 억울한 마음이 줄어들 날이 올 것이다. 스스로를 아픔이 있는 사람이라 여기지 않을 날이 올 것이다. 엄마와 아빠를 온전히 사랑할 날이 올 것이다. 내 모습을 보고 힘을 얻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나는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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