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서 내가 잊히면 좋겠다.

가정폭력 생존자의 절박한 자애

by 가람

어떠한 것이든 어느 정도 잊을 수 있어야 건강한 상태이다. 발가락을 문턱에 부딪히거나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면, 새삼스레 발가락과 손가락의 존재를 확연히 느끼게 된다. 누군가와 사이가 틀어지면 하루 종일 그 사람 생각이 난다. 여태 그 자리에 있어왔던 것인데, 불편하면 그 존재가 생생히 느껴진다는 것이다.

순간들이 비자발적으로 덧 칠 되며 삶이 되어갔다. 그러한 삶이 쌓여갈수록 그 속엔 온전한 나의 의미가 결핍되어있음이 느껴졌다. 살아있어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비참할 만큼 그저 나로 하루를 살아내고 싶었다. 자발적인 순간들을 쌓고 싶었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 한치의 아쉬움이 없어지면 좋겠다. 그 순간들이 쌓여 온전한 나로 살고 싶단 집착에서 평온해지길. 결국 그렇게 나의 의미가 건강히 잊히면 좋겠다.

이토록 잊고 싶은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사는 곳, 하는 일, 나이와 이름을 제외하면 날 정의할 말들은 어떤 것이 남을까. 취미가 무엇인지조차 얘기하지 못할 때 직장을 그만뒀다. 나를 찾아 떠나야만 했다. 한때의 난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던 어린아이였다. 그저 존재만으로 기특한 아이. 때때로 난 공주가 됐다. 빛나는 붉은 공주 드레스를 입었다. 어른들의 예쁨을 한가득 받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날 바라보는 눈빛은 따스한 눈빛에서 차가운 평가의 눈빛으로 바뀌어 갔다. 1인분의 값어치를 해 내야 하는 부품으로 만들어져 가며, 화려했던 드레스는 점차 닳아 없어졌다. 그 와중에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았던 한 가닥의 붉은 실. 그것은 어릴 적의 나와 연결이 되어있었다. 그 실을 잡고 삶을 역행해본다. 어릴 적 내가 원해왔던 삶을 뒤늦게 꺼내 본다. 내가 원하는 온전한 나의 삶을.

스스로가 부정될 때마다 절박하게 읽고 썼다.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설득될 때까지. 조금은 스스로의 존재와 가치를 인지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진정한 삶이 시작됐다. 때문에 나는 현재 두 살이다. 나를 잊기 위해 오늘도 나를 살아낸다. 요즘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잊힐 때까지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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