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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02. 2023

가정폭력 가해자를 사랑합니다.1

가정폭력 생존자의 절박한 자애

'이렇게 살면 죽을 것 같아.'

대학교 4학년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기숙사에서 잠시라도 아빠를 피해 지낼 수 있던 기간이 끝나감을 의미했다. 졸업을 한 뒤엔 대학교 1학년때부터 시간제 강사로 일 해왔던 대형 미술학원에 전임으로의 계약이 확정됐다. 직장의 위치는 집에서 버스로 30분. 출퇴근을 핑계로 자취하기엔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다. 사형날짜가 정해진 사형수의 기분이었다. 하루하루 졸업날짜가 다가올수록 우울증이 심해졌다.


비정상적인 집안임을 깨닫게 된 이상, 이전처럼 살 수 없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벗어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옷을 입은 상태였다 해도 10대 때까지 장난스레 나의 가슴과 엉덩이, 성기를 만졌던 아빠니까. 성폭행범과 학교폭력가해자를 옹호했고, 어쩌다 가족 단체채팅방에 답이 느리기라도 하면 폭력을 휘두른 아빠였으니까. 그런 아빠의 눈치를 365일 24시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이를 엄마에게 토로해도

"좋은 게 좋은 것이지 뭘 또 뒤끝 있게 다 기억해? 그래서 어떡할 건데. 집 나갈 거야? 부모 지원 없이 너 혼자 잘 살 수 있겠어? 나중에 결혼할 때 부모랑 사이 안 좋은 애인 거 알면 시댁에서 얼마나 무시하겠니? 경제적 지원 없이 너 혼자 잘 살 수 있겠니? 그냥 아빠 앞에서 애교 좀 떨면 다 해결될 일인데."

라며 아빠에게 굴복을 종용했다.


현실적으로 당장 아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빠에게 접근금지조치를 취하고 여성 지원기관에서 지낼 생각도 해봤지만, 해외로 도주를 하더라도 어떻게든 찾아올 아빠였다. 날 살릴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을 고심했다. 결론은 남은 기간 동안 아빠에 대한 증오를 줄이는 것이었다. 내 마음이라도 편히 살아야 했다. 아빠와 깊고 긴 대화로 풀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이전 시도에 실패한 뒤론 고려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아빠에 대한 마음을 털어낼 수 있을까 고민이 이어졌다.

4학년이 되며 1년간 진행할 졸업전시의 주제를 정해야 했다. 원래는 기존 작업하던 유화의 연작을 할 생각이었다. 작업 기획도 마쳤다. 4학년 개강이 다가올수록 내게 필요한 작업은 유화가 아님을 다. 앞으로 아빠와 한 집에 살아도 견딜 수 있도록 내 마음에 숨통을 트는 작업이라 확신이 들었다. 동시에 겁이 났다. 이 얘기를 정말 입 밖에 꺼내도 괜찮은 것일까. 지금의 나는 과거 어떤 일들을 당했고, 어떤 감정이었는지 쉽게 나열할 수 있지만 대학생 시절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가정폭력에 대해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일들을 생각하면 커다란 암흑이 내 한가운데 꽉 막혀있는 것 같았다. 암흑에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얘길 시작해야 할지 갈피 잡을 새 없이. 켜켜이 묵혀왔던 눈물만 솟구쳤다. 깊은 물에 빠져있다 건져진 사람이 물을 토해내듯, 그저 통곡만 가능했다.


개강을 하고서도 두 주제 사이에 끊임없이 고민을 했다. 교수님과 졸업전시에 대한 첫 면담 전날 밤까지. 정확히는 용기를 내는 것을 주저했다. 선택해야 하는 주제는 확실했다. 면담 당일 새벽, 제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살고 싶다니. 스스로가 안타까워 눈물이 흘렀다. 역시 과거에 대해선 말보다 감정이 앞섰다. 이대론 논의 당일이 돼도 교수님께 어떠한 말씀도 드릴 수 없겠다 싶었다. 종이와 펜을 들어 교수님께 설명드릴 졸업전시 주제와 작업방향에 대해 정리했다. 글을 쓰다 눈물을 흘리며, 다시 글을 쓰며 밤을 새웠다. 면담 시간이 됐다.  교수님의 눈을 바라봤다. 수없이 되뇌며 연습한 말들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교수님께선 고요히 기다려주셨다. 내게 배정됐던 논의 시간은 10분. 결국 9분이 지날 때까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미리 써둔 편지를 교수님께 드렸다.


다음 시간 교수님께선

"네가 겪은 일들에 대해 어른으로서 미안하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부모에게서 듣고 싶었던 얘기를 교수님께 듣게 됐다. 죄송함, 비참함, 감사함, 슬픔, 아픔. 그 무엇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네 마음이 가벼워지기 위해서라도 아픔에 대해 꺼내 보이려는 결정을 응원한다. 다만, 아직 타인에게 그 아픔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많이 힘든 상태이잖니. 작품화시킬 경우 불특정 다수에게 네 이야기를 들려주게 될 것이고. 그전에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구나. 교내 심리상담센터 이용을 해보렴. 그 과정에서 상처의 크기를 줄일 수도 있을 것 같고."

그간 타인에게 아픈 기억을 꺼내 보이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엄마가 '절대 숨겨야 할 어두운 과거'로 주입시켜두기도 했고, 그때 기억을 되짚으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말보다 눈물이 앞섰기에 누구 앞에서도 얘길 할 수가 없었다. 작품 구상을 할 때도 괴로웠다. 나보다 훨씬 큰,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칠흑의 실타래 안에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어떤 부분을 어떻게 작품화시켜야 할지 정리되지 않은 채 우당탕탕 쏟아지기만 했다. 때문에 심리상담이 꽤나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인생 첫 심리상담이 시작됐다.


교내 심리상담은 주 1회씩 진행됐다. 1회기당 50분 상담, 10회기를 기준으로 했다. 50분의 상담 중 45분을 오열했다.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나 좀 살려달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악'소리 낼 수도 없이 뜨겁고 무거운 눈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상담실을 나설 땐 온몸에 힘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열을 반복하자 상담일이 두려워졌다. 그러던 와중 5회기 때 상담사 선생님께

"다솜 씨만 힘든 게 아니에요. 보통의 가정폭력 가해 아버지들은 계속 나쁘게만 대하는데, 다솜 씨 아버지께선 잘 대해주실 땐 잘 대해주시잖아요."

란 얘기를 듣고 상담 종료를 신청했다. 상담을 통해 상처를 덜어내기보단 상처를 얻은 것 같기도 했다만. 타인에게 아픔을 말하는 연습을 했음에 의미를 두었다. 옛 기억을 들여다볼 때에도 늪에 빠진 사람처럼 급박하게 허우적대는 것이 줄었다. 여전히 눈물은 주체할 수 없었지만. 겪었던 가정 폭력들을 찬찬히 되돌아보았다.

아빠가 내게 저지른 행위는 분명한 폭력이다. 동시에 아빠의 방식으로 나를 끔찍이 사랑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격주로 토요일 등교를 했다. 급식은 평일에만 진행됐다. 학부모님께서 종종 반 전체에 간식을 보내주셨다. 하루는 당시 간식으로 자주 배달 왔던 '콜팝'이 배달됐다. 플라스틱 큰 판자 뚜껑(약 40*40cm)이 있는 상자에 40여 개의 콜팝이 담겨있었다. 유달리 개구쟁이였던 한 남학생이 큰 판자를 교실 앞에서 부메랑처럼 학생들을 향해 날렸다. 미처 보지 못했던 나는 빠르게 날아온 플라스틱 판자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다. 눈썹에서 턱 까지 대각선으로 길게 파인 상처가 생겼다. 얼굴에 피가 흘렀고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다. 연락을 받은 엄마는 날 바로 병원에 데려갔다. 아빠는 그 시각 이성을 잃고 남학생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했다. 남학생의 부모는 처음엔 아빠를 만류하려 했지만 아빠의 눈빛을 보곤 이내 조용해졌다고 한다. 남학생의 어깨를 부서져라 꽈아악 잡았는데 겁에 질려 악 소리도 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부모가 보는 앞에서 아빠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도록, 내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힘든 일이 생기면 잘 도와주겠음을 약속하도록 했다고 한다.

"뭘 또 그렇게까지 했어!"

난 아빠를 나무랐다.

"걔 얼굴도 똑같이 판자로 그어버리려다 참은 거야."

아빠의 생각과 행동이 옳지 않았음을 안다. 동시에 아빠는 어쩌면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삐뚤게만 알았던 걸까 싶었다. 아빠도 할머니에게 폭력을 당하며 자랐으니까. 난 그런 아빠의 결핍까지 포용하고 아빠를 사랑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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