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에게
오늘도 당신이 소개해 준 노래를 들으며 글을 썼습니다. 8시간 길이의 그 노래말입니다. 사실은, 당신에 대한 글을 쓸 때만 이 노래를 듣습니다. 이 직전에도 당신을 썼다는 것을 들켰네요. 물론,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현재 재생되고 있는 부분은 4시간 32분 49초입니다. 당신 생각을 하며 글을 쓴 지 4시간 32분 49초가 됐다는 뜻이겠습니다. 한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이 노래가 끝이 나면 제게서 당신의 존재가 작아지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적고선 무슨 뜻인가, 잠시 생각했습니다.
브런치스토리에 발행한 브런치북 '가정폭력 생존자의 절박한 자애' 마지막 페이지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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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것이든 어느 정도 잊을 수 있어야 건강한 상태이다. 발가락을 문턱에 부딪히거나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면, 새삼스레 발가락과 손가락의 존재를 확연히 느끼게 된다. 누군가와 사이가 틀어지면 하루 종일 그 사람 생각이 난다. 여태 그 자리에 있어왔던 것인데, 불편하면 그 존재가 생생히 느껴진다는 것이다.
순간들이 비자발적으로 덧 칠 되며 삶이 되어갔다. 그러한 삶이 쌓여갈수록 그 속엔 온전한 나의 의미가 결핍되어 있음이 느껴졌다. 살아있어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비참할 만큼 그저 나로 하루를 살아내고 싶었다. 자발적인 순간들을 쌓고 싶었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 한치의 아쉬움이 없어지면 좋겠다. 그 순간들이 쌓여 온전한 나로 살고 싶단 집착에서 평온해지길. 결국 그렇게 나의 의미가 건강히 잊히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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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내용이요. 당신이 더 이상 제게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일지, 결국 우리가 함께하게 되어 유난스럽게 당신 생각이 나지 않길 바란다는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든 이 노래가 끝이 나면 당신의 생각이 덜어지길 바라요.
어제 스승님의 북토크를 다녀왔어요. 소담한 대화가 오가던 중 제게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100%가 좋다고 하는 것만큼 징그러운 것이 없어요.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반은 좋다고 하고 반은 별로라고 하는 상태예요."란 얘기였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의 신춘문예 등단 당시 댓글에 '이것은 시가 아니다.'란 내용을 봤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것을 읽고 1초 동안은 머리가 띵했어요. 이내 '아, 세상에 시 쓰는 사람은 많고 많은데 난 시가 아닌 특별한 것을 쓰는 사람이네? 좋다!'라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아까 얘기한 '별로라 말할 반'을 먼저 만났으니 앞으로 좋다고 말할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이 높겠구나 생각하니 행복했습니다."란 이야기였습니다.
안타깝게 져버린 당신이 떠올랐어요. 남들은 "너 좋은 사람인 것 아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뭣하러 네 가치를 몰라보는 소수의 사람들을 신경 써?"라 하지만, 전 당신과 제 관계가 여전히 유감입니다. 나 알고 보면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인데. 조금 더 티를 냈어야 했나 아쉽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당신과 함께했던 노래를 들으며 글을 쓰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 없음도 안타깝습니다.
이 글을 쓰다 당신의 생각에 혼곤히 취해 잠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꿈에 당신이 나왔고 내 소식을 궁금해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뒤 만난 현실은 괜스레 어제보다 차가웠습니다. 새삼 생각합니다. 잠시 하늘로 붕 떴던 기억 때문에, 원래 발 붙이고 살던 땅을 추락한 뒤 만난 종착지로 느끼며 미워하게 될 줄이야. 혹시 모르지요. 이 노래가 끝이 나도 시작점으로 되돌려 또다시 재생을 할지도요. 이전에 그랬듯 말입니다. 결국 반복재생을 하며 지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렴풋하게 걱정이 됩니다. 어쩌면 이 노래 총 재생시간이 뫼비우스의 띠를 닮은 8시간인 것이 이유일까요. 이 긴 노래를 이젠 거의 다 외워가는데. 이번 노래 끝엔 당신이 없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