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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조기 I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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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Feb 08. 2022

더 스팅, 코리안 버전

장편소설

1971년 2월, 꽃샘추위의 스산한 바람이 목덜미를 맴도는 어느 날,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 18세가 된 한 소년이 주민등록을 하기 위해 수안 파출소에 가서 지장을 찍은 후 동래구청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때, 20대 말에서 30대 초로 보이는 아래위 초록색 군 작업복 차림의 남자 1호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학생, 이 근처에 물건 보관창고가 어딘가요?"

 "모르겠는데요."


 "허허 낭패네."  

 "무슨 일인데요?"


 "나는 월남 파병 용사로서 오늘 귀국하여 부산항에 내렸어요. 돌아올 때 그동안 받은 월급으로 미군 PX에서 물건을 좀 사 왔지요. 그래서 며칠간 물건을 보관해 놓을 장소가 필요한데, 참 큰 일이네요.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요."  


그가 비록 동래 토박이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장소가 떠오르지 않아 당황해하는데 마침 소년의 바로 뒤에서 걸어오던 남자 2호를 본 남자 1호는 '그럼 저분한테 한번 물어봅시다.' 하면서 그에게도 똑같은 질문과 설명을 한다.


남자 2호는 아래위로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은 50대로 보이는 신사로서 2단 접이식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 우산은 일본에서 개발한 것으로, 처음 보는 사람들은 마치 요술 방망이를 보는 것처럼 신기해할 때였다. 

남자 2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한다. 


"창고는 잘 모르겠고…. 그래, 월남서 들고 온 물건이 무어요?"


소년은 더 이상 자신이 있을 필요가 없다 싶어 그만 가려는데 남자 1호가 슬며시 그의 소맷자락을 끌면서 그대로 좀 있으라는 눈짓을 보낸다.


그러자 남자 1호는 영국제 양복 기지, 양주, 일제 카세트, 하며 읊어대는데 소년의 귀에 다른 말은 그냥 스쳐 지나갔지만 카세트라는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는 평소에 일제 카세트(tape recorder)가 너무나 갖고 싶었다.


남자 2호가 말했다.


"그럼 그 양복 기지 한 번 봅시다." 


이에 남자 1호는 

"제가 점심 먹고 물건을 중국집에 잠시 맡겨놓았으니 저 골목에서 기다리면 가지고 올게요." 

하면서 동래구청 바로 옆에 있는 골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자 2호가 먼저 골목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남자 1호는 재빨리 학생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속삭였다.


"학생, 나는 군인이라 세상 물정 모르는 데다 월남에만 있다 보니 국내에서 받아야 할 가격이 얼마인지 잘 몰라. 그러니 학생이 중간에서 흥정 좀 잘해 주라. 피 값으로 모아 산 물건인데 바보처럼 너무 싼 값에 넘겨줄 순 없지 않은가? 그래 주면 내가 학생에게 섭섭잖게 사례함세.”


세상 물정 모르기는 소년이 더 했지만, 그는 사례란 말에 귀가 솔깃하여 그들을 따라 골목으로 갔다. 

남자 1호가 물건을 가지러 간 사이 이번엔 남자 2호가 소년에게 말한다.


"학생, 저 청년이 학생을 많이 믿는 모양인데 사는 사람으로선 한 푼이라도 싸게 사야 하지 않겠는가? 학생이 흥정만 잘 붙여주면 내가 학생에게 사례를 할게"


소년은 붕 떴다. 

'물건값이 얼만지 알지도 못 하지만 그딴 것 내 알 바 없고, 나는 서로가 부르는 가격의 중간 값으로다가 대충 흥정만 해 주면 된다. 그러면 나는 양쪽에서 커미션을 받게 되고 여기다 내 돈 조금만 보태면 카세트 하나가 생긴다. 흐흐,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가 아닌가?'

그때부터 그의 머릿속은 온통 카세트로 가득 찼다.      


드디어 남자 1호가 비닐로 밀봉된 양복 기지를 들고 나타났다. 

물건을 건네받은 남자 2호가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으음~ 영국제네. 기지도 마음에 들고." 하고는 둘이서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몇 번 말이 오가더니 서로 간에 가격이 잘 맞지 않는지 '가격은 학생에게 전적으로 맡기자'며 그의 도움을 요청했다. 소년은 중간값으로 흥정을 끝내주었고 이제 돈만 챙기면 되는 장밋빛 타임이 왔는데 돌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흥정은 끝났고, 이제 집에 가서 돈도 가져와야 하고, 물건 감정도 좀 받아봐야 하니 나와 함께 갑시다."

 "저는 나머지 물건들을 전부 중국집에 잠시 맡겨놓았기 때문에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데요."


 "뭐, 안되면 말고."

 "아이고 우짜노!"  


다 된 거래가 수포로 돌아가게 생긴 남자 1호는 잠시 생각 끝에 말했다. 

"그럼 학생, 학생은 거짓말할 사람으로 안 보이니 나 대신 이것 들고 같이 갔다 와 줄 수 있겠나?"

"그러지요."


"그런데, 내가 학생을 믿긴 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지라 이 비싼 물건을 그냥 줘서 보낼 순 없지 않겠소? 그러니 서로 믿음의 징표로 뭐 하나 나에게 맡기고 가면 어떻겠나?"


그 말에 소년은 딱히 생각나는 물건이 없었다.

"제가 뭐 맡길만한 게 있어야지요."


그러자 남자 1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거기 시계라도 맡기면 되겠네. 그래 봤자 양복 기지와 비교는 안 되겠지만."


순간 소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시계는 며칠 전 아버지가 대학 입학 기념으로 사 준 시계였다.


그 집에선 아들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마다 롤렉스 다음으로 비싼 오메가 시계를 아버지가 선물했는데 이 아들에겐 특별히 오메가 금딱지를 선물했고 그는 그 시계가 얼마나 비싼 건지 몰랐다.

아무리 잠시라지만, 아버지가 준 선물을 함부로 남의 손에 맡긴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반사적으로 "그건 안 돼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 1호는

"앗~따, 젊은 사람이 우째 이래 사람을 못 믿노? 그러면 내 군인 신분증인 ‘찡’을 당신한테 맡길게. 이 찡은 군인한테는 생명줄 같은 거라. 자, 받으소."


그 순간,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가면서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나 그만둘래요." 하며 물건을 돌려주려 하였다. 


그러자 남자 1호가 말했다.

"학생이 군대를 안 가봐 놓으니 참말로 세상 물정을 모르네. 기회라는 건 올 때 잡아야 하는데 우째 이래 좋은 기회를 의심 때문에 놓치려 하노?"


그러자 또다시 카세트에 대한 욕심이 구름처럼 뭉글뭉글 올라왔고 두뇌의 파이버는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거 네다바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은 한패다. 그런데 찡과 물건은 내가 들고 간다. 비록 찡이 가짜라 해도 물건이 내 손에 있다. 물건까지 가짜라 해도 네다바이꾼 중 한 명을 내가 잡고 있다. 그러면 내가 당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끝내 아버지가 준 선물을 남에게 함부로 풀어줄 순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을 때,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 1호가 마지막 필살의 승부수를 던졌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마~ 그만둡시다. 학생, 내 물건 이리 주소."      


그러자 소년은 바로 눈앞에 있던 카세트가 갑자기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한 느낌에 허탈감이 물밀듯 밀려오고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마치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듯 자신도 모르게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주고 말았다.


소년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찡'이라는 이상한 신분증과 양복 기지를 들고 남자 2호와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남자 2호는 집에 가서 돈도 가지고 와야 되고 감정도 받아야 한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년도 최대한 빨리 걸었으나 둘 사이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저씨, 좀 천천히 갑시다."

 

"학생, 빨리 안 오고 뭐 하노?"


남자 2호는 더더욱 빨리 걷기 시작했고 소년도 왼쪽 다리 보조기에서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뛰듯이 걸었지만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다.


남자 2호는 골목길로 들어갔다. 또다시 불길한 예감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소년이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 골목으로 들어갔을 때 남자 2호는 보이지 않고 그 길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길이 갈라지기 전에 있는 서너 채의 집 중 어느 하나에 돈 가지러 들어갔는지, 아니면 갈래길 하나로 도망을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빨리 판단해야 했다. 소년의 머리는 팔랑개비처럼 돌아가다 남자 1호가 물건을 맡겨두고 기다리겠다던 그 중국집을 향해 또다시 달렸다. 중국집에 다다랐을 때 그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숨은 턱에 찼다.     


"아저씨, 여기 물건 맡겨놓고 있는 군인 아저씨 어디 있어요?"

"오잉? 우리 사람 그런 거 몰라해!"     


소년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런 사람 온 적도 없고 그런 물건 맡긴 적도 없다 하였다.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정신을 수습한 후 소년은 아버지 단골 양복점이자 자신의 옷도 한 번씩 맞춘 적 있는 '동래 양복점'으로 찾아가 감정을 의뢰했다. 


"이거, 양복 기지라기는 그렇고, 마~~ 작업복보다 조금 나은 정도네." 

   

양복점 주인의 냉정한 선고가 떨어지자, 기지를 팔면 시계값의 상당 부분 충당할 수 있을 걸로 기대했던 소년은 눈앞이 노래졌다. 


양복점을 나온 그는 차마 노한 아버지의 얼굴과 대면할 자신이 없어 정처 없이 걷다가 집으로 향하는 십자로 건널목 앞에서 하염없이 서 있었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 석양에 비친 그의 오른손에는 가짜 양복 기지가 전리품처럼 들려있고, 에니카로 빛나던 왼 손목은 맨살을 드러낸 채 스산한 바람만 들락거렸다.

크지 않은 그의 두 눈에는 곧 떨어질 것만 같은 쓰라린 눈물방울이 석양에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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