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애, 응애, 응애..."
6.25 전쟁이 끝나기 4개월 전인 1953년 1월 23일 새벽 2시.
부산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동래'에 있는 한 부잣집에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안남도 강동(江東) 출신의 아버지와 부산 동래(東萊)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4남 중 3남으로 태어난 그 아이의 이름은 바단 나(羅) 자에 영화 영(榮) 자를 써서 한나영으로 지어졌다.
그가 태어난 집은 동래 지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건평 80평짜리의 고래등 같이 큰 기와집이었다.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는 방이 두 칸 달린 아래채가, 오른쪽으로는 커다란 창고, 목욕탕, 닭장, 그리고 장작 보관소가 담장을 따라 있었고 그 끝 모퉁이에는 화장실이 자리했다.
아래채와 위채 사이에 있는 넓은 마당 왼쪽에는 장독대와 빨래터가, 중간에는 연못이, 오른쪽에는 잘 가꿔진 정원이 있었다. 연못을 지나 위채에 다다르면 서양식 식당, 안방, 응접실, 그리고 커다란 건넛방이 긴 대청마루를 따라 이어졌고 입주 하인 2명은 남녀를 구분하여 아래채나 건넛방에 기거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는데 해방이 되자 조국으로 돌아와 평소 왕래가 잦던 동래에 자리를 잡고 당시 여학교 교사이던 미인 아내와 결혼하여 각각 세 살 터울의 세 아들을 두었다.
이렇게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유복한 집안에서 영아기를 보낸 나영은 돍이 다 된 무렵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온 식구가 대청마루 양쪽 끝에 나눠 앉아 한쪽에서 손뼉을 치면 그쪽으로 어설픈 걸음으로 뒤뚱거리며 걸어갔고 끝까지 가면 식구들이 안아주며 환호하고, 또 반대쪽에서 손뼉을 치면 그쪽으로 걸어가 안기고. 이렇게 해서 그 집에서는 저녁마다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박수 소리에 웃으며 걸어가던 아이가 중간에서 넘어졌다.
그런 일은 전에도 종종 있었고 어린 아기가 걷다가 넘어지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에 다들 더 웃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본능적으로 달려가 나영을 잡아 일으켰지만 그는 서있지 못하고 도로 주저앉았다.
집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나영은 온몸이 펄펄 끓으면서 열이 40도 가까이 오르내렸고 사지는 마비되었다.
온 집안에 비상이 걸렸고 그 어머니는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동래에서 하나밖에 없던 동네 의원 원장은 이런 환자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독감쯤으로 진단했으나 증세가 심상찮자 큰 병원으로 가 보라 하였고 거기서 ‘소아마비'란 진단이 내려졌다.
소아마비란 병은 그때까지만 해도 이 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던 병으로 6.25 전쟁통에 외국 군인에 묻어 들어온 바이러스가 당시 열악한 영양 및 위생 상태에 놓여있던 영유아들에게 코로나 번지듯 확 퍼진 것이다.
집안사람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다 죽는다던 나영은 사경을 헤매다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사지가 마비되어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
이 바이러스는 척추 속에 들어있는 척수(脊髓, spinal cord)의 앞쪽에 있는 운동신경 부분을 선택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에 감각은 정상이나 근육을 잘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대부분은 가볍게 왔다 지나가면서 한쪽 다리만 약간 저는 후유증을 남기지만 그는 아주 독한 놈을 만나 사지가 마비되어버렸다.
다행히 여느 신경성 질환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온갖 치료를 다 받으면서 어느 정도 마비는 풀렸고 바이러스 침범이 덜한 오른쪽은 비교적 근육 위축도 덜하고 힘도 어느 정도 돌아왔다.
하지만 왼쪽은 팔다리 모두 심한 근육 위축으로 보기 흉할 정도로 곯았고 손 발가락은 정상적으로 잘 움직이지 않았으며 왼발은 밖으로 넘어가 발등으로 바닥을 딛는 형국이 되었다.
이리하여 나영은 잠시 걸음마 정도 맛본 후 인간의 정상적 보행 능력을 영원히 상실한 지체장애인이 되었고, 이는 보행장애뿐 아니라 보편적 인간에게 주어지는 기본 인권과 평등권마저 박탈당한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가혹한 운명의 굴레를 그에게 씌워주었다.
신체에 마비가 오면 침 맞는 것이 거의 전부던 시절, 용하다는 침쟁이 집에는 어린 환자들로 미어터졌고 나영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침이 마비된 신경을 어느 정도 회복시키는 효과는 있어도 한 번 돌아간 발이나 앙상하게 곯아버린 팔다리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자식의 병을 낫게 할 방도를 백방으로 알아보다 한 가닥 희망의 줄을 잡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전문의 제도 자체가 없었고, 정형외과를 전문 과목으로 표방하고 환자를 보는 외과 의사가 있긴 하였지만 소아마비로 변형된 발을 제대로 바로잡아줄 고난도의 수술을 감당할 의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기댈 곳은 오직 하나, 선진 의술과 경험을 겸비한 (선교사들이 세운) 서양계 병원뿐이었는데 때마침 부산에서 가까운 대구에 그런 병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 병원은 미국 북 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의료선교사 존슨이 1899년 ‘제중원’이란 이름으로 설립한 한국 최초의 서양 병원이었다. 나영은 거기서 뼈를 깎고 뼈를 고이고 인대를 자르고 인대를 붙이는 고난도의 수술을 받고 돌아간 왼발을 정상에 가깝게 되돌릴 수 있어 그동안 발등으로 디디던 것을 발바닥으로 디딜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의술이라기보다 차라리 마술에 가까웠다.
6·25라는, 세계 전쟁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전쟁이 할퀴고 간 한국 땅에는 전투 중 팔다리가 잘려나간 상이용사들(wounded soldiers)과, 애먼 민간인 부상자들과, 어린이 소아마비 환자까지, 그야말로 나라가 지체장애인으로 넘쳐났지만 이들의 재활치료를 담당할 의료진도 의술도 장비도,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한국전쟁 때 의료지원단을 보내준 의료선진국들이었다.
그들은 본국에서 의료진과 물리치료 장비를 들여와 물리치료사를 양성함과 동시에 정부가 지은 재활원에서 재활치료와 훈련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전쟁 중 지어진 최초의 재활원은 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한반도 최남단 부산. 그중에서도 동래 온천장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것이 국립재활원의 모태가 된다.
나영은 네 살 때 받았던 수술로 발은 되돌아왔지만, 발목관절을 잡아줄 인대와 근육이 위축되어 그대로 두면 발은 다시 돌아가고 다리는 휘어진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수술 후 재활치료가 필수적인데 그 치료센터 역시 자신이 살던 지역에 들어왔으니 나영에게는 하늘이 내린 두 번째 축복인 셈이었다.
재활원에 다니게 된 나영이 제일 먼저 만난 건 보조기(補助器)였고 그가 신은 보조기는 발끝에서부터 허벅지 끝까지 오는 장보조기(long brace)였다. 이것은 수술한 발이 도로 넘어가지 않고 다리가 휘지 않게 하반신 전체를 잡아주는 보조 장치로서, 그 속에 발과 다리를 집어넣고 신기만 하면 바로 서지도 못하던 아이들로 하여금 혼자 걸어 다닐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아이 부모들에게 있어 보조기는 단순한 보조 장치를 넘어 일종의 신물(神物)인 셈이었다.
이 보조기를 신고 2년 동안 피나는 재활훈련을 받은 나영은 일곱 살이 되어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쯤에는 지팡이 없이 혼자 씩씩하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고 보조기는 평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 뜀박질이라도 할라치면 거기서 나는 철커덕거리는 소리는 신경을 거슬릴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