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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조기 I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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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Feb 15. 2022

소망과 소명

장편소설

입학식을 치르고 난 나영은 감개무량했다. 

의과대학에 들어오기까지 그가 겪었던 힘들었던 일들이 어제 본 영화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많이 들은 세 마디가 있었다.      

그중 첫마디는 '너는 집안에 돈이 없었더라면 벌써 죽었을 아이다'였고, 

두 번째는 '(비록 돈이 있었다 하더라도) 네가 살려고 그만큼 발버둥 치지 않았더라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아이다.'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나영이 침 맞으러 다닐 때의 상황을 수없이 들려주었다.     


“그때는 어른들도 침 맞으러 간다 하면 겁이 났다. 대못 같은 침을 몇 방 맞고 나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지. 그러니 그 어린 갓난아이들이야 오죽했겠냐? 침을 한 번 맞아본 아이들은 자기 차례가 되어 이름이 불리는 순간 안 들어가려고 온갖 발버둥을 다 치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너는 네 이름을 부르면 너 스스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갔고, 침놓으면 아프다고 울고, 다음 날 아침이면 침 맞으러 가자고 재촉했단다. 이토록 네가 살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더라면 넌 벌써 죽었을 아이야.”     


아버지의 첫 번째 말은 어린 나영도 이해할 수 있었다.     

병원 치료에, 보약에, 침에, 고난도 수술에, 2년 동안의  재활치료에, 보조기에, 그리고 11살 때 받은 2차 수술까지. 의료보험이란 말도 없던 시절에 그런 치료 다 받으려면 집 한두 채 값은 족히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두 번째 말에 대해서는 나영이 학교를 들어가고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죽어야 할 사람이 발버둥 친다고 살아날 수 있다면 세상에 죽을 사람이 없겠네.'

그러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건 아마, 살겠다고 발버둥 쳐대는 내가 하도 불쌍해서 저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가 살려주신 걸 거야.   그러면 나는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지? 그래, 나중에 나도 의사가 되어 나 같은 사람 치료해 주면 되겠네.'   


그 후 나영은 누군가가 "앞으로 커서 뭐가 되고 싶니?" 하고 물으면 ’의사‘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한편,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이 꼭 의사가 되었으면 했다.

저런 자식이 앞으로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 험한 세상을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는 데는 의사 만한 직업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로의 동기는 달랐지만, 아버지의 소망과 아들의 소명 의식이 맞아떨어져 그 아버지는 아들의 뒤를 힘닿는 대로 밀었고 나영 역시 공부에 온 힘을 쏟았다.     


그 집안에서 결석이란 낱말은 '병영 무단이탈'이란 말만큼이나 엄중한 말이었고, 그 집 아들들에게 6년 개근은 고스톱 판에서 기본 3점으로 나는 거나 마찬가지 점수였다. 그 결과 형제 4명 모두 6년 개근을 밑밥으로 깔았고 첫째는 9년, 둘째는 12년 개근을 하였다.


몸이 불편한 나영이 개근상을 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소풍 가는 날이었다.

나영이 국민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소풍을 원족(遠足)이라 했다. 말 그대로 멀리 걸어간다는 뜻이다. 

멀리 걷지 못하는 나영은 당연히 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그런 날도 결석으로 처리되지 않을 방도를 생각해냈다.


소풍 가는 날이면 나영도 소풍 가는 것처럼 먹을 것이 잔뜩 든 리꾸사꾸(リックサック, 백팩)를 메고 학교로 갔다. 학교 운동장에는 전교생이 모여 웃음 가득한 얼굴로 웃고 떠든다. 시간이 되면 각 반마다 일렬로 줄을 서고 담임선생님들은 출석을 체크한 후 질서 정연하게 대오를 맞추어 출발한다.


학교에서 출발한 원족 행렬은 항상 나영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어, 행렬이 집 앞을 통과할 때 나영은 대오를 이탈하여 집으로 들어갔다. 물론 담임선생남과는 그렇게 하기로 사전 양해가 이루어졌다.


나영이 마당에 있는 평상에 리꾸사꾸를 풀어놓으면 어머니와 하인들이 나와 다 같이 둘러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펼쳐 놓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소풍 온 기분을 내주었다. 이리하여 나영은 결석 대신 조퇴로 처리되어 6년 개근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석 불가'의 룰은 과외공부 다닐 때도 엄격히 적용되었다.     

나영은 어려서부터 언어 과목에 소질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영어를 제일 재미있어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가정교사로부터 개인 과외를 받았고, 고교 2학년 2학기부터는 담임인 영어 선생님 댁에 두세 명 되는 팀을 짜서 과외공부를 다녔다.      


나영의 집은 인성문에서 300m 정도 아래에 있었다. 

신작로 외에는 가로등이라고는 없던 시절, 새벽 5시쯤 일어나 캄캄한 비포장길을 손전등 하나 들고 더듬듯 내려가 동래시장 입구에 있는 수안 파출소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온천장까지 갔다. 거기서 금강원 입구까지 걸어가, 다시 오르막길로 10분 정도 올라가야 선생님 집에 다다랐다. 40분간 수업을 받고 왔던 길로 되돌아와 아침 먹고 등교하는 생활을 1년 이상 하였다.               


잠 좀 더 자고 싶은 날, 눈·비 오는 날, 몹시 추운 날, 바람이 많이 부는 날 같이 참으로 가기 싫은 날도 예외는 없었다. 냉정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런 날 아버지는 ‘몸도 성치 않은 녀석이 가다가 어디서 넘어지지나 안 했는지?‘ 하며 아들이 무사 귀환할 때까지 애끓는 마음으로 새벽잠을 설쳤다.     


나영의 아버지는 그 아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대했다. 나영이 잘못하면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나영의 가는 종아리를 때렸다.

하지만, 나영의 가시권 밖에는 촘촘한 보호막을 쳐놓았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나영밖에 없었다.     


나영은 어릴 적 재활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교 삼 년 동안에는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였고, 이제 부자간에 하나 된 목표인 의과대학 입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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