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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r 18. 2022

길 잃은 사슴

장편소설

"형, 나도 형 따라 낙제했소. 거 참, 아래위 지키기 힘드네. 술이나 한잔 사주소.”      


아버지에게 범행을 발각당한 후 죄인처럼 생활하던 나영에게 그동안 소식이 뜸하던 후배 헌기가 찾아와서 한 말이다.


“야 이놈아, 누가 니 보고 낙제를 해 달라 했나? 내 후배 되어 달라 했나? 지 마음대로 늦게 들어와서, 지가 농땡이 쳐서 낙제해 놓고 지금 누굴 원망하노?”


그 둘은 그런 사이였다. 

친구보다 더 흉허물 안 가리고, 함부로 말해도 기분 안 나쁜 그런 사이였다. 

그리고 그는 몸이 불편한 나영이 시키기만 하면 무엇이든 불평하지 않고 해 주는 그런 사이였다.  


고등학교 한 해 후배인 그가 나영의 눈에 띈 것은 그의 독특한 외모와 차림새 때문이었다.

나영이 예과 2학년에 올라갔을 때, 새로 들어온 신입생 한 명이 중처럼 박박 민 머리에다 아모레 화장품 외판원들의 햇빛가리개용 모자를 쓰고 다녀 별 희한한 놈 다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 두 사람은 신입생 환영회를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해 고교 동문 신입생 환영회는 삼랑진 딸기밭에서 하기로 하고 그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여학생들과의 미팅 주선은 신입생들이 맡았다. 하지만 당일, 여학생 숫자가 몇 명 모자라 햇볕 쨍쨍 내리쬐는 딸기밭에서 마음에도 없는 선탠이나 하며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된 이재민이 발생하자 2학년 선배들은 이놈들 군기가 빠져 그렇다며 단체 기합을 주기로 했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 오후, 대학 캠퍼스 한구석 외진 강의실에 1, 2학년이 다 모였고 1학년들은 교실 앞쪽에 일렬로 세웠다. 

몽둥이를 든 2학년 대표가 그들의 죄를 엄중한 목소리로 꾸짖은 후 “다들 엎드려뻗쳐!”라고 하자, 신입생 2명이 못 맞겠다고 뛰쳐나가는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사태가 발생했다.


'우째 이런 일이!?'


동래고 출신으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초유의 일이 벌어지자 2학년 선배들은 눈이 삥 돌아 애꿎은 나머지 후배들의 햄스트링 근육에 빨랫방망이 두들기듯 몽둥이찜질을 했다.

단체 응징이 끝나자 선배들은 몽둥이가 부러져 나갈 정도의 매질을 이를 악물고 견뎌낸 기특하고 불쌍한 후배들에게 단합대회를 하자며 학교 밑에 있는 막걸릿집에 몰려가 다들 눈동자가 풀릴 정도로 퍼 마셨다.


그때 마침 헌기가 나영의 앞에 앉게 되었고, 술자리에서 하는 그의 행동과 말을 유심히 지켜본 나영은 '별 희한한 놈 다 보겠네!'에서 '별 괜찮은 놈 다 보겠네!'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야, 너 중 될 일이 있나, 대가리는 와 그래 빡빡 깎았노?"


 나영은 술이 한잔 거나하게 되자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헌기에게 던졌다.     


"제가 의대를 지원한다 했을 때 담임을 위시하여 어느 누구도 합격하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 역시 합격은 꿈도 안 꿨고요."


"별 미친놈 다 보겠네. 떨어질 줄 알면서 시험은 뭐 한다고 쳤노?"


"그렇게 억지 지원을 한 이유는 재수든 삼수든 무조건 의대에 진학하겠다는 일념으로 경험 삼아 한 번 쳐본 거라요."


헌기는 입학시험을 치른 후, 자신은 당연히 떨어졌다 생각하고 합격권에 들고도 남는 친구 몇몇의 참고서와 노트를 불하받아 비장한 각오로 머리까지 박박 깎고 바로 재수 모드로 돌입했다. 

심심한 하늘의 장난이었는지, 아니면 입시 관계자의 착오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모든 이의 기대를 저버리고 심지어는 자신까지 기만해가면서 예정에 없는 합격을 하게 된 헌기는 당장 머리가 걱정되었다.


절에 들어가 재수 공부하겠다고 스스로 자초한 문어대가리. 이미 잘려 나간 머리카락을 도로 붙일 수도 없고. 

그래서 그는 보기 싫은 민머리 위에 따까리를 하나 얹고 다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야 이 친구야, 하필이면 왜 그 모자냐? 품격 떨어지게 스리!"   

 

의아해하는 나영의 질문에 돌아온 그의 대답이 나영의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저한테 모자라고는 그것밖에 없었거든요."


나영은 그 말에 가슴이 아파 그때부터 그 후배를 누구보다 가까이하게 되었고 그 둘은 서로 죽이 잘 맞았다.

헌기는 의대생치고는 참으로 별난 인생길을 걸어왔다.


부모 형제도 멀쩡히 있는 녀석이  중3 때 집을 나와 독서실이나 학교 생물 실습실 같은 곳에서 잠을 자며 

과외 선생, 여자 속옷 장사, 흥신소 정보원 등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다 해가며 학교에 다녔다 한다.

세찬 비바람을 맞으며 잡초처럼 자라난 헌기는 부모의 그늘이라는 온실에서 자란 나영이 오더를 내리기만 하면 못 해내는 일이 없었다. 해결사란 표현이 딱 어울렸다.


한 번은 나영의 귀에 그의 여자 친구 주변에 웬 똥파리 한 마리가 욍욍거리고 날아다니며 집적댄다는 소문이 들려와 헌기에게 그 뒷조사를 지시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흥신소 경력자답게 1주일 동안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그 파리의 출신성분, 주변 인물, 여자관계 및 평판 등에 대해 보고한 후 준비한 '에프킬라'로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끝냈다.


그리고 그는, 나영이 낙제할 때마다 따라 낙제하여 두 사람 사이에 아래위가 뒤바뀌는 일은 없었다.  

   



"형, 낮에 갈 데 없지요? 내가 자리 잡아놓았으니 이제부터 6개월 동안 나하고 지냅시다."


그가 나영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 곳은 자신이 사는 영도 영선동에 있는 한 독서실이었다.  

그때부터 나영은 의대 지망 3수생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그곳에서 낮시간을 보냈다. 나영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서민 냄새 폴폴 나는 동네에서, 그때까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독서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되었다.


저녁이 되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헌기와 함께 술집을 헤매고 다녔다.     

어느 날 저녁, 그들은 광복동과 남포동을 잇는 첫 번째 골목 안  '유정집'에서  한잔 걸친  후 2차 할 장소를 찾아 남포동 입구로 들어서서 '부산초밥' 앞을 지나갔다.

저녁 어스름에 네온사인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남포동 거리를 정처도 없이 어슬렁 거리며 가다가 ’미음사‘ 레코드방 근처에 다다르자 김세환의 ‘길 잃은 사슴’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갈까/ 길을 잃고 헤매던/ 사슴 한 마리/ 네온사인 반짝이는/ 갈림길에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고/ 잃었던 그리운 님/ 찾아서 가네』    

 

갈 데도, 오라는 데도 없는 처량한 신세. 

나영이 허탄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야, 헌기야. 우리가 지금 딱 저 신세네."


"그러게 말이요."

거친 들판 같은 인생길을 혼자 힘으로 헤쳐 나온 헌기가 맞장구쳤다.


「한 마리 길 잃은 사슴과 한 마리 외로운 늑대

그들 두 사람에게 이만큼 어울리는 표현은 없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그들은 밤늦게까지 마셨다.

그리고 그날 밤, 

나영은 길 잃은 사슴에서 성난 늑대로 변해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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