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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Dec 18. 2022

나12 비극과 희극(1) 머리 긴 짐승의 비애

나이 들어 좋은 점 - 결말을 보게 된다

비극과 희극의 차이(2)비극과 희극의 차이(2)

봉변

# 때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2년, 내가 의예과 2학년이던 시절

그때 나는 의대 그룹사운드인 메디칼포(Medical Four, M4) 4기 싱어(singer)로 입단했다.


우리는 그해 가을에 있을 정기공연에서의 데뷔를 위해 장전동에 있는 부산대학교 캠퍼스에서 한창 연습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본과에 올라와 그동안 준비한 것을 선배들 앞에서 평가를 받으라는 오더가 떨어졌는데, 사정이 생겨 오라는 날짜에 가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가게 되었다.     


원래 의과대학은 군기가 세기로 유명하다. 

다들 걱정이 되었다. 올라가서 무슨 기합을 어떻게 받을지.

그래서 우리는 담력을 키우기 위해 막걸리 한 잔 마시고 가자며 출발하기 전 학사주점에 들어갔다.     


역시 낮술은 빨리 취했다.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이 되고, 다들 알딸딸해서 술집을 나와 18번 버스를 타고 아미동에 있는 의과대학으로 향했다.  

   

연습은 의대 운동장 한 귀퉁이에 세워진 가건물 수준의 목조로 된 조직학 실습실에서 하게 되어있었다.     

엘렉트릭 기타 베이스의 그룹사운드가 되다 보니 소리가 커서 본격적인 발표회 연습은 본관 건물 내 동아리실에서 하지 못하고 운동장 옆 가건물로 쫓겨나야  했다.

 

생전 처음 가보는 의과대학.

우리는 선배들이 가르쳐 준 대로 병원 건물을 지나 의대 건물에 다다랐는데 소변을 자주 보는 편인 나는 급 오줌이 마려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먼저 가 있으라고 하고 나와 세관이는 본과 건물 일 층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둘이 나란히 서서 가득 찬 방광을 시원하게 비울 때 오는 짜릿한 배설의 쾌감을 만끽하고 있는 사이, 뭔가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웬 건장한 사나이 하나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뭔가 심상찮은 기분이 들어 ”내가 뭘 잘못했나? “ 하고 생각해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못 한 게 없다.  

남자 소변기가 있는 걸 보면 여자 화장실도 아니고..     


그래서 속으로 “이 양반이 남 오줌 누는 것 처음 보나? 뭔데 기분 나쁘게 째려봐?” 하며 서둘러 일을 끝내고 돌아서는데, 대뜸 “뭐 하는 새끼들이야?” 하며 반말지거리가 아닌가!     


뭐 이런 게 다 있노 싶어 속에서 열이 확 올라오는 찰나, 선배들의 경고가 퍼뜩 떠올랐다.     

“너희들, 본과에 올라오면 수위든 뭐든, 특히 가운 입은 사람하고 마주치면 무조건 대구리 숙이고 지나가라. 부딪히지 말고.”     


그래서 성질 죽이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과생입니다.”      


그러자 

“예과 새끼들은 다 이렇게 대가리 기르고 다녀?” 하더니 내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며 

”이기이~, 사람이가 짐승이가?”라 하는 것 아닌가!     

(당시는 장발이 한창 유행할 때였다.)     


내 나고 이런 모욕은 처음 당했다. 눈물이 팍 쏟아질 것 같았다.

'에이 씨팔, 이판사판 확 처받아 버려?'

     

그런데 아무래도 상대가 주니어 교수 같아 보인 데다 또다시 선배의 경고가 떠올라 성질 꾹 누르고 

”죄송합니다." 하고 대구리 숙였다. 

내 인생에 가장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옆에서 그 꼴을 보고 있던 세관이는 순간적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어, 이 새끼 어디 갔어? " 하더니 나는 놔둔 채 세관이를 잡으러 바로 뛰어나갔다.    


나는 참으로 비참한 기분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연습장으로 갔다. 

연습장에서는 하늘 같은 2기 선배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시끄러운 록 뮤직을 연주 중이었고 창가에는 이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분위기의 흰가운을 입은 지도교수가 서있었다.          


취중 도주


한편, 세관이는 본관 건물 안으로 줄행랑을 쳤는데 처음 간 건물인 데다 술까지 알딸딸해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온 층을 다 돌아다니며 도망을 다니다가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막걸리를 마신 데다, 아까 미처 용무를 다 끝내지도 못한 채 급히 지퍼를 올리고 도주하는 바람에 또다시 소변이 마려워진 것이다.     

그대부터 그는 화장실을 찾아 한참을 헤매다 마침내 한 곳을 발견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남자 용 소변기가 보이지 않아 '이거, 여자 화장실인가?' 하고 나가려다 세면대가 보이길래 온 김에 손이나 씻고 가자 싶어 손을 씻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쾅' 하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한편, 세관이를 뒤쫓아 간 남자는 복도 코너에서 그만 그를 놓쳐 그 역시 온 층을 샅샅이 뒤지며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연기처럼 사라진 그를 끝내 찾지 못하고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가 분이 안 풀려 씩씩대면서 '쾅' 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놈이 바로 자기 방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지 않은가!     


원래 눈이 나쁜 편인 데다 술까지 취한 세관이가 흐릿한 시선으로 화장실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온 곳이 하필이면 그 교수의 연구실이라니!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런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그는

"(Nice to meet you,) 이 새끼 너 잘 만났다!" 하며 욕설과 함께 세관이의 뺨을 한 대 후려쳤다.

 

성공한 외과 개원의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포스랍게만 자라온 그가 생면부지의 사람으로부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욕설에다 귀싸대기까지 처맞자 너무 억울하고 분한 나머지 그는 엉엉 울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연습실에 다다랐다.


그는 그때까지 분이 안 풀려 출입문을 양손으로 '탁' 쳤는데,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이번에는 그 손이 그만 문 위쪽에 달린 조그만 유리창을 치고 말았다.     


"와장창" 하며 유리 깨지는 소리에 다들 놀라 연습하다 말고 뛰어나가 보니 깨진 유리 조각에 그의 손목이 그여 팔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는데 다행히 동맥은 피해 갔다.


선배들은 급히 손수건으로 상처를 동여매고 그를 응급실로 데리고 가 몇 바늘 꿰매는 응급처치를 받게 했고 한바탕 가슴 쓸어내리는 소란이 종료된 후 한 선배가 말했다.


“에이~~, 오늘 연습은 도저히 안 되겠다. 다들 나가서 술이나 한잔하자.”


이렇게 해서 나와 본과와의 첫 만남은 다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쓰라린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그 정체불명의 무법자 사나이와 나 사이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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