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조간신문을 뒤적이다 <대중문화> 면에 실린 한 조연배우 인터뷰 기사 타이틀에 그만 눈이 확 빨려 들어갔다.
-주연은 연기력보다 인격인데… 그래서 전 조연 좀 더 하려고요-
이 타이틀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부싯돌 켜지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번쩍했다.
'아니, 배우가 어떻게 저런 말을!'
인터뷰 내용
20대 초반부터 연극을 시작한 그는
"촬영장에 갈 때 빼고는 대학로를 벗어나는 적이 거의 없다. 집도 이 동네에 있다"라고 할 정도로 연극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가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건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그는 "예전에 영화 오디션을 보는 친구 따라갔다가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었다. 그런데 식구가 늘어나는 순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들었다"고 했다.
"막상 마음먹고 오디션을 보려니까 잘 안되더군요. 한 서른 번쯤 떨어졌던 것 같아요. 그러다 출연하게 된 게
곽경택 감독님의 '챔피언'이었죠."
그가 관객의 눈에 띄게 된 것은 '거북이 달린다' 때부터.
조금 허술한 동네 깡패 역을 능청스레 해낸 덕에 '명품 조연'이란 평을 들었다.
이 얘기(명품조연)를 하자마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내가 어느 정도 이뤘구나'란 생각에 너무나 행복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명품 조연'이 너무 많아요.명품은 희소성이 생명 아닌가요?"
올해 영화들도 신정근이 나온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뉠 것 같다.
상반기에만 '은밀하게 위대하게' '깡철이' '더 파이브'의 촬영이 있고, 최근에는 공중파의 4부작 드라마에도 나왔다.
"이쯤 되면 주연 욕심이 나지 않느냐"고 하자 그는"솔직히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할 수 없다"고 했다.
"주연을 하려면 연기력 말고 인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두 시간 동안 스크린에 나오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배우의 인격이 드러나거든요. 그래서 전 조연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가 남긴 여운
위의 기사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3년 2월 5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것이다.
당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민트같이 향긋한 맛으로 내 가슴에 스며들어 큰 울림을 주었고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겼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인격자보다는 능력자를 숭배하는 사회.
성과 위주의 사회. 그것도 속성재배 선호 사회.
안전의식보다는 살마의식이 앞서는 사회.
그러다 보니 대학총장도 인격자보다는 돈 많이 끌어올 정치력 있는 사람이 선택받고, 선생이라는 사람도 스타 강사 같은 약장사스타일이 인기고, 논문의 질보다는 논문 편수 많은 교수가 훌륭한 교수로 대접받고, 오랜 연구기간이 필요한. 그래서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는 그런 연구 과제는 국가 연구비 지원조차 제대로 못 받는다.
그러다 보니 나로호가 저 모양이 되어버렸고, 그러다 보니 출근길에는 카레이싱이라도 하듯 남의 차를 앞지그로, 그러다 보니 오늘도 세월호 같은 배가 시한폭탄을 안은채 유유히 떠 다닌다.
이런 시대에, 저런 철학을 가진 배우가 있다니 이 얼마나 신선한 충격인가!
참 기분 좋은 아침이다.
다시 찾은 그
그리고 그 후,
아리마 히데꼬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그가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졌다.
인터넷을 뒤져보다 2020년 8월 9일 자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다.
《강철비 2: 정상회담》이란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거기서 신정근이 비중 높은 조연으로 나와 찬사를 받자 인터뷰한 것이다.
사진자료 - 중앙일보
대기만성이란 말도 부족하다.
1987년 극단 ‘하나’ 단원으로 연기를 시작해 97년부터 스크린과 안방에서 고루 ‘감초 조연’으로 활약한 것만 20여 년.
누구라도 한 번쯤 봤을 법한 이 얼굴이 최근 150만 가까운 관객을 모은 영화 ‘강철비 2: 정상회담’(감독 양우석)에서 잊지 못할 ‘북의 얼굴’로 떠올랐다.
북한 핵잠수함 백두호의 부함장 장기석을 연기한 배우 신정근(54) 얘기다.
“정우성이 아니라 신정근이 진짜 주인공”이란 후기가 쏟아질 정도다.
사진자료 - 중앙일보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신정근은 “진짜 히든카드” “라이징 스타”라는 세간의 호평에 쑥스러워했다. “다른 셋(정우성·유연석·앵거스 맥페이든)은 팩트(실제)에 가깝고 나는 창조적 인물이라 매력이 플러스 된 것 같다. 북한 군인이 남한 대통령까지 구하니 좋게 보이나 보다”고 했다
“자꾸 추켜세우니 걱정스러워요. 이제 마음대로 당구치고 산 다니던 시절은 끝났다 싶고…. 대본받았을 때부터 멋진 배역이라 생각했지만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뜨거운 반응이) 놀랍죠.”
오랜 세월 무명으로 지내는 동안 술자리로 자주 어울렸던 동료들이 있다.
마동석·오정세·고창석·박혁권 등 일명 ‘신스틸러(scene stealer) 모임’인데 요즘은 다들 바빠서 잘 모이지 못한다고.
“이젠 다 잘 됐다. 저만 좀 뒤처져 있었는데, 이런 날 올 줄 알았다”
면서 그간 배역 고를 때 철칙을 털어놨다.
“한 배역에 너무 깊이 가지 말자.
악당·강간범 같은 건 하지 말자.
너무 코믹하게도 말자….
코믹이 이슈가 돼 바로 올라가더라도 한 배우가 얼마나 많이 보여줄 수 있을까 싶었어요.
성실하게 하면 언젠가는 올라갈 거니까. 하하, 큰 그림 그리길 잘했죠.”
이 영화에서 다소 투박한 외모가 우직한 부함장 역할에 적격이었던 건 사실.
같은 소속사인 정우성도 “분장 안 해도 될 만큼 딱이다 싶어” 그를 추천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극단 시절 후배들 잘 살피는 형의 모습이 배역에 어울린다 싶었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실제로도 “후배들에게 거칠게 하다가도 어깨동무하는 스타일”이란다. 영화 속 ‘잠수함 내전’에 휘말린 상황에서 젊은 사병들을 다독이는 노련한 리더십이 그저 ‘연기’로만 된 게 아니란 얘기다.
“원래 자료 조사를 많이 하고 현장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이번에도 각국 잠수함이 배치된 해도를 구해 A4용지에 그림 그려가며 대사를 암기했죠. ‘심흥택 해산으로 간다’ ‘좌현 얼마 틀어’ 이런 걸 시뮬레이션하는 거죠. (영화 자문인) 김용우 함장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직접 액션을 벌인 장면은 없지만 날렵한 군인으로 보여야 해서 좁은 잠수함 속 동선 체크를 습관적으로 했다. “축구도 오래 하고 등산도 거의 매일 가는 데다 젊어서 복싱했던 게 있어서인지” 준비된 체형처럼 비친다. 그간의 감초 역할과 사뭇 다른 이번 배역은 “제가 많이 간 것도, 배역이 다가온 것도 아닌 중간쯤”이라는데 맞춤옷처럼 딱 맞는다.
나는 주연으로 사는가 조연으로 사는가
어제저녁 그 영화를 넷플릭스에서 찾아서 봤다.
스토리도 황당하고 캐스팅은 더 황당한데 저런 영화가 왜 히트를 쳤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딱 하나. 조연배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골랐다.
마치 신정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조잡한 캐스팅을 한 영화 같다.
그의 연기는 하는 둥 마는 둥 밋밋하고 전혀 튀는 맛이 없다.
그래서 전반부엔 실망했다.
그런데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을수록 그 슴슴한 연기에 깊은 맛이 우러나면서 주인공보다 더 큰 존재감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