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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조기 I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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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Apr 14. 2022

투명인간이 되다

장편소설


여름 방학이 지나고 슬슬 찬바람이 불 때가 되자 졸업 후의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나영은 어려서는 오로지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본과에 올라와서는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지체장애인의 재활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지도교수와의 상담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고 말았다.


그 교수는 나영더러 ‘환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의사보다는 건강한 의사를 더 원하는 법’이라면서 임상 의사가 되기보다는 기초의학을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하였다.


‘나 같은 사람은 의사 노릇 하면 안 된다?‘


이제 곧 의사가 될 꿈에 부풀어 있던 나영에게 그 지도교수의 말은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의 조언인 만큼 자신이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 본 것이라 생각하고 진로를 기초의학으로 바꾸기로 했다.     


기초의학이란 해부학, 조직학, 생리학, 유전학, 약리학 같은 임상의학을 떠받혀주는 기초학문을 의미한다.

의대를 졸업하고 기초의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의사면허를 딴 의사가 병원에서 환자를 보는 임상 의사가 되는 대신 대학 연구실에 남아 순수 기초학문 연구에 투신한다는 의미다.    

 

임상 의사가 관객들의 환호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오르는 배우나 가수라면 기초의학자들은 무대 뒤에서 빛도 없이 묵묵히 일하는 스테프들과 같다. 게다가 봉급도 쥐꼬리만한 자리인지라 의대 출신이 그런 과에 남겠다고 하면 그 과에서는 쌍수를 들고 반기는 그런 입장이었다.    

 

나영은 우선 어떤 과에 티오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 결과, ‘조직발생학’이란 신생 과에 티오가 하나 있는데 동급생 중 한 사람이 이미 지원한 상태였다.   

‘임상 의사도 안된다, 기초에도 길 곳 없다. 도대체 나더러 어떡하란 말이냐?’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현실의 벽 앞에서 나영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며칠 후, 혹시 그사이에 어떤 변수라도 생겼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나영은 본인에게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 과에 지원한 임진세란 친구는 나영과는 입학 동기도, 같은 고교 출신도 아닌지라 서로 얼굴만 알았지 말은 거의 해본 적 없는 사이였다. 그런 그와 이런 예민한 부분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려면 아무래도 술이란 매개체가 필요할 것 같아 나영은 저녁에 시간 있으면 막걸리나 한잔하자고 제안했고 그는 흔쾌히 응했다.     


술이 한잔 들어가자 서먹했던 분위기가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10잔쯤 들어가자 호칭도 ‘니', '내' 하는 '니내돌이’로 발전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나영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조직발생학 교실에 지원했다며?"

"그래."     


"야~ 그 춥고 배고픈 기초의학을 택하다니, 참 대단하다야. 니 진짜로 할 거가? “     

그러자 진세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아이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다."     


나영은 그만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데?"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긴장하며 묻는 나영의 말에 진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임상보다는 기초가 더 적성에 맞을 것 같아서 여름 방학되기 전에 주임교수 찾아가서 지원 의사를 밝히고 교수님도 오케이 하셨어. 그런데,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병원을 물려받아야 할 녀석이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라며 난리가 났다 아이가. 그래서 지금 이러지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목하 고민 중이다."


그 말에 귀가 번쩍 띈 나영은 자신의 사정 이야기를 한 후 그가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자신이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 말을 들은 진세는 뛸 듯이 기뻐하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구세주가 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밤늦도록 술을 마셨고 진세는 나영에게 다음과 같은 다짐까지 하였다.

"야! 너, 그 과 하다가 선배들처럼  배고프다고 중간에 도망가면 내가 가만 안 둔다이!"

  



일주일 후, 나영은 그 과 주임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님, 이 과에 남고 싶습니다."     

"자넨 곤란해."


첫마디에 거절이었다.     

뜻하지 않은 대답에 나영은 멍해졌다.


"이유가 뭡니까?"   

"우리 과는 출장도 많이 다녀야 하는데 자네 몸으로 되겠나?"


나영은 화가 났다. ‘이 과가 무슨 고고학과라도 되나? 레이더스처럼 유골 발굴하러 다닐 것도 아니면서.’

나영이 말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원자가 이미 있어. 동기들끼리 경쟁할 순 없잖아!"


교수는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문젠 알고 있습니다. 진세를 만났더니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하겠다 했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벌컥 화를 냈다.

"뭐야? 그 친구는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무슨 이런 일이! 그럼, 진세가 아직 교수에게 말도 안 했단 말인가?  

   

"어디 건방지게 너희들끼리 하니 마니 하고 있어? 그 친구 당장 나한테 오라 그래!"


교수는 화가 단단히 났고 그럴 만도 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 나영의 일차 면담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영은 진세를 찾아가 따졌다.

"야!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직도 교수님께 말도 안 하다니."

    

그는 차마 교수 얼굴 보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단다. 그리고 나영이 찾아가서 대신 이야기해주면 될 줄 알았단다. 술 마실 땐 온갖 호기 다 부리더니 알고 보니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친구였다. 나영은 이런 녀석 믿고 앉았다간 또 무슨 똥바가지를 뒤집어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안 되겠다. 너, 나하고 같이 가자. 그리고 내 앞에서 교수님께 네 입으로 똑똑히 말해라. 이 과 못한다고."

     

며칠 후 나영은 그를 데리고 교수실로 찾아갔다.

그 교수는 비만한 체구에 큰 얼굴에 오묘하고 무섭게 생긴 관상에 항상 근엄한 표정이라, 학생들은 그 앞에만 서면 마치 저승사자 앞에 선 것 같아 주눅이 들었다. 그런 교수가 화가 나서 사천왕상(四天王像) 같은 표정을 하고 있으니 마지못해 나영과 동행한 진세는 또 말이 달라졌다.     


"교수님, 전 군에도 가야 하고 이 친구 의지가 확고하니 이 친구로……"      


그러자 교수가 말했다.
"너, 시력이 나빠서 군에 안 갈 가능성이 크다고 했잖아!"


"알아봤더니, 이 정도로는 군 면제받기가 힘들 것 같다고…"     

"아무튼, 아직 군 신체검사받은 것 아니잖아. 신검 후 결과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     


나영은 진세가 '비록 군 면제가 되더라고 집안 사정 상 이 과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자신 앞에서 분명히 밝히기를 바랐지만 그는 끝내 그러지를 못했다.     


신검 결과, 그는 군면제를 받지 못하고 졸업과 동시에 군의관으로 가야 했다.

그 말은 곧, 그는 더 이상 나영의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나영은 안심했다.

이제 마지막 쐐기만 박으면 되었다.


나영은 그에게 다시 한번 단단히 다짐받고 그를 데리고 교수실로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교수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일어서서 진세를 반갑게 맞이하며 응접용 소파에 앉혔다.

하지만 나영에겐 앉으란 말은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영은 발자국을 떼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교수는 마치 나영이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웃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 군에 가게 되었다고? 괜찮아! 의무감이 내 친구니 나중에 임관하게 되면 너 좀 잘 봐주라고 부탁해 주마. 갔다 와서 우리 과 하면 되지 뭐."     


                 이 자리까지 와서 자신의 의사 하나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영구 같은 친구
                     제대 후 자기 과를 할 거라 믿고 공들이고 있는 영구 형님 같은 교수
                      그리고 말 한마디 못 끼어들고 얼어붙은 듯 서 있는 투명인간 나영     


나영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한 기(氣)는 그 두 사람을 말없이 휘감으며 소용돌이쳤다.

무시당하는 고통! 그것은 거부당하는 고통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거부는 분노와 오기를 유발했지만, 무시는 사람 속을 후벼 파면서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그들의 유치한 코미디를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젠 떠나야 할 시간.

그 방에 발을 들여놓은 후 처음으로 나영이 입을 열었다.


"교수님!"    

교수는 곁눈질로 흘깃 쳐다보았다.


"그동안 제가 주제도 모른 채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올려다본 것 같네요.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나영은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 올렸다. 대답도 없었고 잘 가란 말도 없었다.

오히려, 나영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던 화기애매(和氣曖昧)한 그들의 대화는 곧 이어졌다.     


나영은 이제, 자신이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존재, 말 해도 들리지 않는 존재.

그 방에서 나영은 유령 같은 존재였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비가 살포시 내리고 있었다.

계단에서 얼굴을 들어 무심한 하늘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겨울 찬비가 방울방울 얼굴에 맺혔고 그 사이로 뜨거운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으으~윽, 오늘 당한 이 수모, 내 죽도록 잊지 않으리! 그리고 나! 언젠가는! 사람 하나 제대로 가려볼 줄 모르는 당신의 그 흐릿한 두 눈을 수치스럽게 만들어 줄 것이며, 오늘 내린 당신의 이 어리석은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리라!"   


비는 계속해 내렸으나 눈물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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