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1977년, 나영은 본과 3학년이 되었다.
새로 취임한 학장은 학사 전반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겠다며 의욕에 넘쳐 일했다.
1학기가 지나가고 2학기가 되자 나영은 학장실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의아한 나영이 수소문해본 결과 1학기 성적이 전 학년 때보다 떨어진 학생들을 한 명씩 학장실로 불러 개별 면담을 한다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학장실이란 곳을 들어가 보게 된 나영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붉은 카펫이 깔려있고 그 끝에는 웅장한 책상을 앞에 두고 근엄한 표정의 학장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영은 평소에 그 교수를 볼 때마다 독일 병정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육중한 체구에,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에, 웃음기 없는 표정에, 절도 있는 몸가짐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군 장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고, 거기에 군복과 모자만 갖춰주면 금방 손이 올라가면서 ”하일, 히틀러!“라고 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엄숙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 계신다.
순간 나영은 고개가 절로 숙어졌고 카펫을 따라 발걸음을 떼는 동안 마치 죄인이나 된 것처럼 고개는 점점 내려갔다. 나영이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학장의 문초가 시작되었다.
“자네, 2학년 때까지는 성적이 괜찮았는데 3학년 올라와서 왜 이 모양이야?”
그 말을 듣자 나영은 작년 말 그의 장애인 친구들이 학교로부터 당했던 그 야만적인 일이 떠오르면서 그동안 마음 깊이 침잠했던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의대 졸업반 말, 의사 국가고시를 치고 나면 각 병원에서는 인턴 채용공고를 낸다.
당시 대부대학병원 인턴에 지원한 사람 중에는 세 명의 소아마비 장애인이 있었고 그중 둘은 나영과 입학 동기들이었다.
인턴 채용시험 당일, 병원 측에서는 수험표까지 소지한 이들 장애인을 시험장에서 내쫓아 시험을 못 보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난킴스’로서의 지원 자격이 아직 확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는 것이 병원 당국에서 내세운 이유였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아래의 두 가지 사항을 알아야 한다.
1) 입영신검(入營身檢)
일반대학과는 달리 의과대학에 입학하면 학업의 단절을 방지하기 위해 학생들로 하여금 일괄적으로 입영연기 신청서를 내게 하여 졸업할 때까지, 혹은 전공의 과정이 끝날 때까지 입영신검을 면제받아 그때까지 징집이 연기된다.
2) 킴스(Kim's)와 난킴스(Non-Kim's)
한국의 경우 병역의무가 있다 보니 병원에서 인턴이나 레지던트를 채용할 때 ‘앞으로 군에 가야 할 사람’과 ‘군에 안 갈 사람’ 두 그룹으로 나누어 뽑는데 전자를 킴스라 부르고 후자를 난킴스라 부른다.
이 중 난킴스 그룹에는 여자, 군 복무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 그리고 군 복무가 불가능한 장애인 등이 포함되는데 인턴 채용시험은 군 신검 이전에 치르게 되므로 엄밀한 의미에선 군 복무 여부에 관한 판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아직 입영신검을 받지 않은 장애인들은 난킴스 채용시험에 응시자격이 없다는 것이 병원 당국의 설명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그날 그 자리에서 쫓겨난 친구로부터 전해 들은 나영은 분노가 폭발했다.
“에이, 새빠질 놈들,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나? 그런 논리라면 여자로 보이는 여학생이 진짜 여잔지 남장 여잔지 아랫도리 까놓고 검사 안 해 본 다음에야 어째 장담하노? 그리고, 사지가 멀쩡하게 보인다고 해서 100 % 군에서 데리고 간다는 보장은 또 어데 있노? 그럼 킴스 지원자도 다 쫓아내야지!”
실제로 그랬다. 킴스 채용시험에 합격했다가 군 신검에서 눈이 너무 나쁘다고,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간다고, 체중이 너무 적게 나간다고 난킴스로 빠지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군에 못 갈 사람인 지체장애인들에 대해 그런 이유로 지원 자격을 박탈한다는 게 말이 되나? 썅! 또 하나 물어보자. 그런 논리로 시험장에서 내쫓은 거라면 지금까지는 와 안 그랬노? 다른 대학에서도 이런 짓을 하는가? 어떤 문명국에서 이런 야만적인 일을 벌인다더노?”
당시 울분에 차서 친구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정신이 약간 나간 사이, 학장이 재차 물었다.
”이유가 뭐야?“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나영은 자신도 모르게 삐딱한 대답이 나왔다.
“저 같은 사람이 공부 열심히 해서 뭣 하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학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영이 학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 같은 사람, 모교에서도 안 받아주는데 공부 열심히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학장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학장님, 작년 인턴 채용 시험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십니까?”
“무얼?”
학장은 짐짓 모르는 척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학장님, 모르고 계셨군요!”
모른다고 부인하니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나영은 친구에게서 들은 대로 그날 시험장에서 있었던 상황을 세세히 설명하고는 격앙된 목소리로 한 방 날렸다.
“학장님! 저 같은 지체장애인이 군에 갈 수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는 국민학생을 잡고 물어봐도 알 겁니다. 그런데 의학박사 학위를 가진 의대 교수님들께서 군 신체검사를 받아보기 전에는 모르겠다고 한다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 아니겠습니까?”
학장의 표정은 표시 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수험표는 왜 나누어주었나요? 그런 논리라면 아예 처음부터 ‘너희는 시험 칠 자격 없다.’ 하고 응시 자체를 못 하게 하지, 왜 시험장에 앉아있는 사람을 다른 응시자들 보는 앞에서 거지새끼 쫒아내 듯 내쫓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나? 나는 전혀 몰랐네.”
궁지에 올린 학장은 또다시 옹색한 발뺌을 했다.
“학장님, 이럴 것 같으면 저희 같은 사람 의과대학 지원할 때부터 받지 말았어야지요. 왜 6년씩이나 공부시켜놓고,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이렇게 무참히 싹을 짓밟는 겁니까? 이게 스승이 제자에게 할 일입니까?”
학장은 코너에 몰린 권투 선수가 원투 스트레이트에, 바디 블로우에, 어프 컷 피니시 블로우까지 한 방 맞은 셈이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날카로운 잽 한방 내뻗는 것은 잊지 않았다.
“흠~ 그러나 한 군! 그럴수록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영이 또다시 되받아쳤다.
“학장님! 모교에서도 안 받아주는 사람, 공부 열심히 한들 어디서 받아주겠습니까? 그런 곳 있으면 나중에라도 한 번 소개해 주십시오.”
성적 떨어진 놈들 불러다 놓고 얼음장 놓아가며 직접 곤장을 치려다 자신이 되래 ‘좆갈아마이신’ 신세가 되고 만 학장은 성적과는 상관없는 대화로 재빨리 말꼬리를 돌렸다.
“자네 부친은 뭐 하시나?”
“공무원 하다가 정년 퇴임하셨습니다.”
나영이 있는 대로 대답했다.
“그럼 학비는 누가 대는가?”
“공무원 하는 형님이 댑니다.”
나영은 장난치듯 거짓말을 했다.
‘자네 공부방은 따로 있는가?“
나영은 속에서 올라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배우라도 된 듯 고개를 약간 숙이고 불쌍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럼 공부는 어디서??”
학장은 측은한 표정으로 물었다.
“동생하고 같은 방 씁니다.”
이젠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그때부터 학장은“사회는 냉정한 것이다. 그러니 그럴수록 실력을 쌓아야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나영을 격려하고 훈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학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나온 나영은 지금까지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현실이 피부에 확 와닿는 것 같았고,
얼마 안 있으면 들이닥칠 인생의 먹구름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대학이 이래도 되는 건가?"
"과연 이 사회는 공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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