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또 한 번의 낙제로 그녀 앞에 나타날 면목이 없게 된 나영은 그녀가 한 말도 있고 하여 몇 달 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허무한 생각이 들어 몇 번 ‘오비베어’로 찾아갔으나 그때마다 묘하게 일이 꼬였다. ‘이 사람 하고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싶기도 하고 더 이상 자존심 상하기도 싫어 이별이란 말도 없이 그냥 멀어져 갔다.
그 후 나영은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본과 2학년에 진급했다.
그해 가을, E4 주 활동기로서의 마지막 공연 날이 되었다.
그들은 청중에 대한 예의로 첫 스테이지는 항상 양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무대의 커튼이 걷히면서 시그널 뮤직이 시작되었다. 공연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각본대로 한 여학생이 올라와 장미꽃 한 송이를 각 멤버 상의 포켓에 꽂아주고 내려갔다.
두 번째 스테이지부터는 재킷을 벗어던지고 조명발 좋은 셔츠차림으로 등장했다. 나영은 마지막 무대란 생각에 한 곡 한 곡 열창했고 관객들은 열광했다. 두 번째 스테이지가 끝나고 꽃다발 증정 순서가 되었다.
꽃다발을 가지고 온 지인이나 팬들이 관중석에서 올라와 각자 전하고자 하는 멤버에게 축하인사와 함께 꽃다발을 주고 악수를 나눈 후 내려간다.
이때,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나영의 앞에 나타났다.
안 만난 지 1년도 넘은 문희가 예쁜 꽃다발 하나를 들고 올라와 나영에게로 다가온 것이다.
나영은 눈을 의심했다. 너무나 반갑고 기뻤다.
꽃다발을 받고 난 후 나영은 귓속말로 공연 끝나고 바로 나갈 테니 강당 밖에 마련된 일일 찻집에서 기다리라 하였다. 그때부터 나영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 생각으로 차 있어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어떻게 부르는지도 모르고 노래를 불렀다. 드디어 공연이 끝났다. 하지만 공연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다.
화려했던 무대의 조명은 꺼지고, 관중들의 열기로 가득 찼던 객석은 썰물 때의 바닷가처럼 썰렁해지고, 남는 것은 '노가다' 일이다.
스피커까지는 못 옮긴다 하더라도 앰프와 기타, 마이크 등 중요 악기는 동아리실로 다 옮겨놓아야 하고, 그러고 나면 어디 가서 실컷 뒤풀이를 해야 그날 일이 끝난다. 나영은 멤버들이 악기 정리하느라 바쁜 줄 뻔히 알면서도, 미안하단 말 한마디 하고는 후딱 상의를 걸쳐 입고 그녀를 만나러 나갔다.
그녀는 단짝 친구와 함께 소나무 밑 야외 찻집에 앉아있었다.
나영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참으로 오랜만이란 말로 인사하고 그들 앞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어색하다.
나영은 '하도 오랜만이라서 그렇나?' 하며 자기 딴엔 말을 이어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두 사람의 얼굴은 계속 굳어있고 분위기는 점점 싸늘해져 갔다. 나영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
'이거 뭐야? 아니, 이러려고 찾아왔나?'
바늘 하나만 갖다 대면 펑 터져버릴 것 같은 그 팽팽한 긴장감을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미안하지만 우리 멤버들 악기 옮기는 것 도와야 하므로 그만 가봐야겠네요…. 다음에 연락할게요."
근 일 년 만에 만났는데, 만난 지 채 10분도 안 되어 돌아섰다. 허망했다.
추리에 강한 나영도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나영이 남포동 길을 걸어가다가 그날 같이 찾아왔던 문희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는 미소 대신 싸늘한 시선으로 한마디 쏘아붙였다.
"나영 씨, 참 너무 하데요. 그 꽃다발, 내 친구가 어떻게 만들어 간 건데…. 조화로 한 송이 한 송이, 근 한 달 동안 공들여 만들어 간 건데, 그 꽃은 어디다 내팽개치고 다른 여자가 꼽아준 꽃을 꽂고 나오다니요, 세상에!"
순간, 나영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영상 필름이 머릿속에서 재빨리 돌아가면서 그제야 그날의 상황이 이해가 갔다.
"아, 맞다!"
상황은 이랬다.
일 년에 한 번 하는 콘서트 날에는 전 멤버가 꽃다발을 많이 받게 되어 공연이 끝난 후에는 그 처리 문제도 만만찮은데, E4의 경우 간호학과 기숙사가 강당 바로 밑에 있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공연 날이면 기숙사 학생들은 공연을 감상하고 난 후 관중이 다 빠져나가고 나면 무대 뒤로 돌아와 별 말이 없는 한 꽃다발을 싹쓸이해 기숙사로 가져갔다. 공연 팀으로서는 큰일 하나 덜어 주어 좋았고, 여학생들은 돈 주고 사야 할 꽃을 그저 얻어 좋으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그날 나영은 그녀가 가져온 꽃다발이 그녀가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든 조화인 줄은 몰랐지만 그것만큼은 집에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파이널 스테이지가 끝나갈 때쯤에는 그저 그녀를 빨리 만날 생각에만 정신이 팔려 꽃다발 생각은 새하얗게 지워져 버렸고, 재킷을 집어 들 때도 위 호주머니에 꼽힌 꽃 한 송이 따위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 간 나영이 우선 그 친구에게라도 먼저 해명하려 하였으나 그녀의 뒷모습은 이미 인파 속에 파묻히고 만 후였다. 나영은 문희를 직접 만나 사과도 하고 이해도 구하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달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해명을 한다고 한들 한번 돌아선 마음이 다시 돌아올까? 사람만 더 구차해 보일 뿐이다.'
모든 것이 꼬여 돌아가는 상황에 그는 깨달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맺어질 인연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흐르는 계곡물에 종이배 띄우듯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이리하여 나영은 그해, 겨울로 꺾어지는 길목에서, 한마디 변명도 못 한 채 잊혀져야 했고 잊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