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머리는 지끈거렸고 ‘도대체 어젯밤에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지?’ 하는 생각이 들자 후회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이제 만 스물두 살짜리 대학생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사고를 친 것이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나영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즐겨 읽어온 추리소설을 토대로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해 면밀히 추리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이면 아파트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다방 종업원은 자신이 어젯밤에 들었던 소리에 대해 문방구 주인에게 말할 것이고 문방구 주인은 바로 길 건너에 있는 파출소에 신고할 것이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수사에 착수한다. 그리고 그들은 두 가지 가능성을 두고 생각할 것이다.
1) 좀도둑의 소행
2) 원한에 의한 범행
제대로 된 경찰이라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첫 번째 가능성은 배제할 것이다.
첫째, 없어진 물건이 없다.
둘째, 도둑이면 살며시 문을 따고 들어오지 어떤 또라이가 유리 벽을 박살 내고 들어오랴?
셋째, 바로 옆집이 전화기상인데, 전화기는 굉장히 비싼데, 뭐 털어먹을 게 있다고 전화기상 대신 잡화점을 박살 낼까?
그러면 자연히 두 번째 가능성으로 압축된다.
경찰이 문방구 주인에게 묻는다.
“당신 최근에 원한 산 일이 있소?”
“예, 남에게 특별히 원한 산 일은 없지만 얼마 전에 단전·단수 관계로 아파트 운영 위원장과 다툰 일은 있습니다.”
그 한마디면 경찰은 우리 집을 주목할 것이고 나이 든 아버지는 용의 선상에서 배제된다.
그럼 나머지 식구 중 남자는 누구인가?
나와 동생인데 고등학생인 동생은 용의자에서 제외될 것이고 남는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나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이거 큰일났네.’ 싶었다.
다시 생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나를 소환해보니 지체장애인이다.
그러면 경찰관은 다방 종업원이 진술한 그 이상한 발걸음 소리를 바로 떠올릴 것이다.
내가 뛴다면 그 뛰는 소리는 일반인과는 다른, 이상한 엇박자 소리가 났을 것이고 보조기에서 나는 철커덕거리는 소리는 고요한 한밤중의 아파트 낭하에 울려 퍼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바로 범인으로 지목된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잡아뗀다.
내가 그렇게 나올 수 있는 이유는그가 범행 현장에서 나를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고 나의 도망가는 뒷모습도 보지 못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내 뒷모습이라도 보았다면 나는 분명 집에 들어오기 전에 그에게 붙들렸을테니까.
하지만 유능한 수사관이라면 나더러 그 종업원 보는 앞에서 아파트 복도를 뛰어가 보라고 할 것이고 그러면 그는 “맞습니다! 바로 이 소리예요!”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증언은 증거로서의 상당한 효력이 발생할 것이고 나는 내 알리바이를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더 이상 도망갈 구멍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영은 가슴이 두근두근, 콩닥콩닥,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문방구 주인이 신고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라는 한가닥 희망이 떠올랐다.
나영은 문방구상 주인의 입장이 되어 상상해보았다.
아침에 출근하여 초토화된 자신의 가게를 목격하는 순간, 전날 자신이 운영위원장에게 위해를 가한 사건을 떠올리며 그것 때문에 보복당한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늙은 영감이 이런 일을 벌였을 리 만무하고 분명 가족 중 누군가 저질렀음에 틀림없다 싶어 가족관계를 알아본다.
그 결과 사내 아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고등학생이고 하나는 대학생이다. 당연히 대학생 쪽에 무게가 실린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한 달 전 입주자 회의에서 고의적으로 위원장의 회의 진행을 방해하던 건장한 마도로스를 우렁찬 목소리와 강력한 카리스마로 한 방에 제압해버리며 깊은 인상을 남긴 한 청년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때는 그 어린 녀석이 누구기에 운영위원회에 나타나 위원장 구하기에 나섰는지 몰랐는데 이제 보니 그 친구가 바로 위원장 아들인 모양이네.” 하며 더더욱 심증을 궅힐것이다.
그래서 그 녀석을 고소하려는 찰나, 전날 자신이 아버지에게 가한 폭언과 폭력을 떠올리며 손이 오그라 들 것이다.
그는 생각하겠지. 만약 내가 그 아들을 고소하면 과연 저들이 가만있을까?
관리비 안 낸다고 단전단수까지 하는 독한 영감에다, 자기 아버지에게 위해를 가했다고 남의 업장 유리벽을 박살 내는 무서운 아들이 있는 집안이다. 내가 재산손괘 혐의로 고소하면 그들은 나를 모욕죄와 폭행죄로 맞고소하겠지. 그러면 내 죄가 훨씬 크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영은 그제야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야 이 자석아, 고소하려면 한번 해봐라.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네 놈을 가만 놓아둘 것 같나?"
하는 배짱도 생겼다.
그 후, 나영은 문방구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아파트를 들락거릴 때는 천천히 걸으며 보조기 소리가 나지 않게 최대한 조심했다.
며칠이 지났다.
아무도 나영을 보자 하는 사람이 없었고, 아버지 또한 이 건에 대해 일절 말이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그 고요가 오히려 나영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상한데, 어째 이리 조용하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어진 나영은 사건 발생 일주일째 되는 날 용기를 내어 현장에 가보았다.
범인은 한 번쯤은 범행 현장에 나타난다는 말이 실감났다.
깨진 유리 벽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갈아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지 3주째 되던 날,
나영의 아버지는 먼 산을 쳐다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툭 던졌다.
“그거 네가 핸?”
나영은 직감적으로 그 일임을 알아차렸고 “예.” 하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 의외였다.
“자~알 했다. 속이 다 씨원~~하구나 야!”
자기 방에 돌아온 나영은 어릴 적에 몇 번이나 아버지로부터 들은 세뇌성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애비는 말이야, 어렸을 적에 나보다 큰 녀석과 싸우다 얻어맞으면 그놈 뒤를 몰래 따라가 그 집 밖에서 돌맹이를 던져 유리창이라도 하나 깨고 도망쳤지. 넌 말이야, 너보다 작고 힘없는 아이들과는 싸우거나 괴롭히지 말라우. 그 대신, 너보다 큰놈이 너를 괴롭히면 맞서 싸우고 힘이 딸리면 돌멩이로 대갈 부셔주라우! 뒷일은 이 애비가 책임질테니끼니. 알간?”
어린 나영은 이런 아버지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간혹 길거리에서 동네 아이들이 나영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며 “에스야 짤라꿍 짤라꿍!” 하고 뒤따라 올 때면 바로 “이노무 새끼들이!”라는 고함과 함께 돌맹이를 집어던져 쫒아 보냈다.
그랬던 아버지다.
군수 시절엔, 도지사가 아버지를 모욕하는 발언을 하자 바로 평양박치기로 들이받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런 분이 이제 나이가 들어 박치기는 고사하고 유리창 한 장 깰 힘도 패기도 없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겠는가.
그 아버지의 상한 자존심과 화를 아들인 내가 한 방에 해치웠다는 생각에 나영은 가슴이 뿌듯해 왔다.
그리고 속으로 가만히 외쳤다.
“아버지, 이제 걱정 마시라요. 지금부터는 제가 아버지를 지켜드릴테니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