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보조기 I 1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우물 Feb 01. 2024

위험한 복수

장편소설

그날 밤 나영이 남포동에서 택시를 타고 공설운동장 앞 대신문화아파트 입구에 들어선 시각은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인 11시 55분이었다. 

1층 상가는 불이 꺼져 캄캄했고 나영은 2층으로 향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르던 계단이 중간에서 꺾어지면서 아래가 내려다보이자 잡화점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나영의 뇌에서는 스파크가 번쩍 일어나면서 어제 일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던 발걸음을 되돌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어제, 나영은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는데 아파트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무언가 분위기가 싸늘하면서 거실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의 표정에도 근심이 어려있었다. 

"아버지는요?"

"안방에 누워계신다."     

평소에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아버지가 해도 지기 전에 누워계신다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나영에게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아파트는 주상복합 아파트로 1층은 전부 상가가 입주해 있었는데 바로 앞에 공설운동장이 있고 주변에는 학교도 많아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 그런데도 그중 두 가게의 주인은 관리비 제때 안 내고 애먹이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이에 운영위원장이던 나영의 아버지는 몇 번의 독촉장을 보내도 말을 안 듣자 언제까지 관리비를 내지 않으면 단전 단수(斷電斷水)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그마저 무시하자 자신이 경고한 대로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그중 한 명인 잡화점 주인이 관리 사무실에 올라와 위원장인 아버지에게 온갖 욕설을 다 퍼붓고, 그것도 모자라 의자에 앉아있는 아버지를 밀쳐 아버지가 의자 채로 뒤로 나뒹굴었다. 어머니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한 후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냐? 그러니 지금 몸 아픈 것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커 저렇게 누웠단다."         


어린 나영에게 아버지는 그야말로 히어로였고 우상이었다.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아버지’라 답하는 나영이였다. 그런 아버지가 퇴임 후 소일거리로 아파트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저런 저질 잡놈한테 평생 겪어보지 못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그놈의 양쪽 뺨따귀를 교회당 종 치듯이 두들겨 패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육체적 한계에 더 화가 났고 이것이 그날 헌기와 평소보다 더 늦게까지 마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바로 그놈의 가게가 있다. 그동안 쌓인 낙제로 인한 스트레스와 어제 품었던 그 분노의 감정이 속에서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고만 있다가 드디어 분출구를 찾은 것 같았다. 


화점 벽은 쇼윈도처럼 유리로 되어있었고 술이 거나해진 나영의 눈에 가게 주인의 얼굴이 유리벽 위에  오버랩되어 왔다.     

 "Nice to meet you! 그래, 너 잘 만났다 이놈아!"   

나영은 주먹으로 힘껏 그자의 얼굴을 갈기고 발로 아랫도리를 걷어찼다. 


그런데 유리벽은 같잖다는 듯 꿈적도 하지 않고 서 있고 오히려 퉁겨나간 자신의 손과 발만 얼얼하니 아팠다. 이에 더욱 열이 받은 나영이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어둠 속에 쇠막대기가 하나 눈에 띄었다. 

순간, 그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것을 집어 들고 유리벽을 힘껏 내리쳤다. 

‘와장창’하는 큰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진 유리조각들이 폭포수 흘러내리듯 일시에 쏟아져 내렸다.      


차마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나영은 눈앞에 벌어진 이 엄청난 광경에 숨이 멎는 듯했다. 

그것도 잠시, 한시 빨리 현장을 벗어나란 절박한 소리가 고막 안쪽에서 울려와 황급히 계단을 올라갔다. 

힘겨운 숨을 내뿜으며 2층에 오르자 눈앞에 있는 다방 안에서 “누구야!” 하는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영이 재빨리 걸음을 옮겨 다방 모퉁이를 돌자 눈앞에 세 갈래 길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정면은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은 사무실들이 입주해 있는 복도, 왼쪽으로 꺾어 돌면 나영의 집으로 가는 복도. 정면 계단은 오르기 힘들고, 오른쪽은 숨을 곳은 있겠으나 지리를 잘 모르고, 왼쪽으로 돌면 훤히 뚫린 복도라 숨을 곳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하나? 또다시 길 잃은 사슴이 되었다. 다방 안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영의 본능은 그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왼쪽으로 가!" 

나영의 집은 복도 입구에서 네 번째에 위치한 209호. 

나영은 또다시 보조기를 철커덕거리며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이것이 나영의 생에 네 번째이자 마지막 뜀박질이었다.    

 212호……. 211호,......., 210호……. 드디어 209호.     


숨을 헐떡이며 대문 앞에 다다른 나영은 여느 때처럼 바지 오른쪽 호주머니에 급히 손을 찔러 넣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열쇠가 손에 안 잡힌다. 

입이 바싹 말라왔다. 

이번에는 왼쪽 호주머니로 손을 넣는데 안 그래도 부실한 왼손이 떨려서 잘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 들어간 왼쪽 호주머니에도 손에 잡히는 게 없다. 

이마에서는 진땀이 배어났고 온몸의 신경 줄은 팽팽히 늘어났다. 

오른쪽 상의 주머니를 떨면서 만졌다. 역시 아무것도 안 만져진다. 

드디어 타닥거리며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눈앞이 아득해졌다   

  

나영은 왼쪽 상의 호주머니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더듬었다. 

만져졌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열쇠를 끼워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된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다가오는데 이번에는 손이 떨려 열쇠 구멍에 열쇠가 잘 끼워지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대못 박듯 콱 찔러 넣었더니 열쇠가 쑥 들어갔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가 살며시 문을 잠근 후 대문에 귀를 대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가까워져 오던 발걸음 소리가 그쳤다.     
"휴우~~~"양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서서히 엉덩이가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부모님이 주무시는지 안방 쪽에서도 인기척이 없었다. 

나영은 현관 옆 자기 방으로 살그머니 도둑처럼 기어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