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보조기 I 17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우물 Apr 04. 2022

하늘이 내린 선물

장편소설

 “형, 편지 온 것 같은데요.”


1978년, 나영은 드디어 본과 4학년이 되었다. 

3월 어느 날, 한 후배가 와서 전해준 이 말에 나영은 의아해했다.

'이상하다. 나한테 편지 올 데가 없는데?

여태껏 학교로 온 편지를 받아본 적 없는 나영은 반신반의하며 우편물 꽂이로 가보았다. 


겉봉에 적힌 수취인의 이름은 분명 한나영이었고, 발신인의 이름은 김백화로 되어있었다.

이름을 보아하니 여자가 분명한데 모르는 이름이었다. 편지를 뜯어 읽어보니 자신은 얼마 전 대부대학병원에 정신과 실습을 나간 성마리간호대학 3학년 학생이란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본과 4학년이 되면 네댓 명씩 조를 짜서 임상 실습을 나가게 되는데 나영은 고교 후배 3명과 같은 조가 되었고 그 조의 첫 실습지는 정신과였다. 그때, 성마리간호대학에서도 졸업반 3명이 실습을 나와 그들과 함께 실습을 돌았고 편지를 보낸 사람은 그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비록 2주 동안 매일 얼굴을 보긴 했지만 서로 말을 나눌 기회는 전혀 없었던 관계로 이름만 가지고는 그 3명 중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편지 내용도 별것 없었다.     

편지에는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나영이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던 모습이 너무 좋아 인사차 편지를 보냈다며 자신의 일상에 관한 신변잡기를 몇 마디 적어놓은 게 다였고 딱히 만나자는 말도 없었다.

     

나영은 레크리에이션과 노래라는 단어를 보자 그날 일이 선명히 떠 올랐다.

정신과 실습 중 단 한 번 있었던 레크리에이션 시간나영은 후배들의 강권에 못 이겨 환자들과 의료진그리고 실습생들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 곡 불렀다

곡목은 <라노비아, La Novia>. 

스페인어로 'la'는 정관사 ’the'에 해당하고 ‘novia’는 여성명사로서 '연인'이란 뜻이다.     

이 노래는 원래 동명(同名)의 아르헨티나 영화 속에서 한 실연한 남자가 연인을 떠나보내면서 불렀던 노래인데, 훗날 이태리 가수 '토니 달라라'가 이태리어로 리메이크하여 세계적인 히트곡이 된 노래다. 


비록 가사는 모른다 하더라도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들 만큼 애절한 이 노래는 당시 나영의 18번이었고, 그날 그가 이 노래를 불렀을 때는 제정신이 아닌 정신과 환자들까지 열렬히 박수를 쳤다. 

나영은 그날 그 장면을 떠올리며 속으로 "아이고, 내가 본과 2학년 정도만 되었어도 당장 달려가겠는데 아까비, 아까비." 하고는 편지에 답장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그러자 한 1주일 후에 또 편지가 왔다.

편지 내용은 그저 자신의 일상에 관해 적어놓은 것뿐인데,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연극 티켓 두 장이 편지와 함께 들어있었다. 나영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하고는 티켓을 동생에게 주고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며칠 후,  또 편지가 왔고 나영은 또 모른 체했다. 

나영이 답장하지 않은 것은 상대를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그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 들어와서 딴따라부터 시작해서 놀만큼 놀았고, 낙제도 두 번이나 했고, 여자도 사귈 만큼 사귀어 보았다. 이제 의사국가고사가 1년도 채 안 남았는데. 만약 여기서 떨어지면 내 인생은 그야말로 종 치고 날 샌다. 이런 시기에 어떻게 내가 연애를 한단 말인가? '    


그러자 또 편지가 왔다. 

왜 답장이 없느냐는 말도 없고 만나자는 말도 없고 좋아한다는 말도 없고 그저 자신의 일상에 대해 적어놓은 것뿐이다.

"나 이거, 미치겠네."


편지의 간격은 점점 줄어들었고 총 일곱 통의 편지를 받고 나자 나영은 이 사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상대가 대학 졸업반이라지만 나는 대학 8학년, 그녀는 3학년. 이 정도 차이면 오빠가 아니라 할배뻘이다. 게다가 나는 대학생치고는 산전, 수전, 공중전에 땅굴전까지 경험한 사람이다.’


이런 그의 눈에 그녀는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소녀에 불과했고, 그런 사람이 메아리 없는 외침을 일곱 번씩이나 울리고 있다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그녀가 안쓰러웠고 한편으로는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모른 체할 수도 없고, 이제야말로 만날 건지 자를 건지 결정해야 했다. 


그때부터 그는 지금껏 잘 하지 않던 기도가 절로 나왔다.     

"하느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내가 지금 연애할 때가 아니잖아요? 내게 또 무슨 시련을 주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제발 좀 살려주이소!"


며칠 동안 간절히 기도하자 드디어 하느님으로부터 응답이 왔다.

어느 날 기도 중, 그동안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짤막한 문구 하나가 그의 마음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늘이 내린 선물


그때부터 이 선물이란 단어는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갔고 그 문장은 대화로 이어졌다.

"이것은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노라."

하느님이 그에게 속삭이자 그는 항변이 절로 나왔다.     


"지금 제가 연애를 한다면 마지막 연애가 될 것이고 그것은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만난다는 뜻인데,

그런 중요한 선물을 주시려면 먼저 제품 설명은 있어야지요.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확실히 알게 해 주셔야 받을지 안 받을지 결정을 내릴 것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이 답했다.

"내 어찌 너에게 나쁜 것을 선물로 주겠느뇨? 그렇게도 나에 대한 믿음이 약한가?"


나영은 당시 신앙심이 그리 깊지 않았다.

비록 가사도우미로부터 전도당한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주일날 한 번 교회는 나갔지만, 그가 가진 믿음은 기독 신앙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나영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죽음에서 구하신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가 자리 잡고 있었지 기독 신앙의 대상인 유일신 개념은 아니었다.


그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육신의 아버지를 부르듯 "아버지이~ " 하고 울부짖고, '항상 나를 지켜주시리라.' 

'내 기도만은 들어줄 것이야.'라는 막연한 수준의 믿음이었지 신앙인으로서의 확고한 믿음은 아니었다.

이제 그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처음으로 시험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내 마음에 떠오른 선물이라는 단어가 하느님의 응답이 아니라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은 아닌가? 또다시 나를 곤궁에 빠뜨리기 위해 마귀가 장난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지금껏 나를 지켜주신 하느님이 내 인생의 명운이 걸린 이 엄중한 시기에 나를 망치려 드는 마귀의 장난을 허락하실 리가 없다.'라는 믿음이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믿음이 의심을 이겼다.    

 

"그래, 가자! 믿고 가자. 하느님 한 번 믿어보자. 세 사람 중 누가 되더라도 그저 하늘이 내게 내린 선물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이자."


마침며칠 후에 성마리병원 방사선과(현 영상의학과)에 실습을 나가게 되어있는지라 나영은 편지 대신 기숙사로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나영은 오전에 방사선과 실습을 돌고 병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병원 바로 옆에 있는 간호대학 기숙사 운동장으로 갔다. 마침 지나가는 여학생이 하나 있어 3학년에 김백화 씨 좀 불러 달라 부탁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기숙사에서는그때 같이 실습을 돌았던 세 명의 여학생이 점심 식사 후 방으로 올라와 함께 잡담하다 그중 한 명이 운동장에 서 있는 나영을 보고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저 사람 그때 그 라노비아 부른 사람 아냐?!"
 

그러자 세 명이 동시에 눈을 돌려 운동장을 쳐다보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거울과 스타킹을 찾느라 부산을 떨었다. 그러다가 후배 여학생이 올라와 "3학년 김백화 선배님, 밖에 누가 찾아왔습니다."라고 하는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은 신었던 스타킹을 조용히 도로 벗었다.     


나영이 기다린 지 약 10분이 지나자 한 여학생이 그에게 다가왔다.

드디어 하늘이 내린 선물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같이 실습 도는 중에는 여자 보기를 돌 보듯 한 데다, 다들 똑같은 가운을 입고 있어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았는데 이제 바로 눈앞에서 그녀의 사복 입은 진면목을 자세히 마주 보게 된 것이다.


그는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그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몸매는 하늘하늘한 코스모스 같았고, 눈앞에 선 그녀는 몹시 수줍어하며 나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만 깔았다.     

아주 당찬 아가씨일 줄 알았던 나영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런 아가씨가 어떻게 답장도 없는 편지를 7통씩이나 보낼 용기를 냈지?’     


그녀가 고개를 들자 얼굴은 하얀 백합 같았고 그녀로부터 받은 첫인상은 청순함. 그리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나영에게는 확신이 왔다.     


하느님 선물 맞네!, 샤론의 꽃이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나영은 그동안 답장을 못 해준 데 대해 먼저 사과하고 그 자리에서 데이트 신청을 했다그녀도 머리를 끄덕였다. 언제가 좋을지 잠시 생각하다가 며칠 후면 맞이하는 공휴일이 좋을 것 같아  5월 5일 어린이날로 정하고, (잊어먹지 않게) 오후 5시로 정했다.     


나영이 말했다.


"백화 씨손 한번 내밀어 보실래요?"


백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나영은 그녀의 손바닥에 '5’라는 숫자를 세 번 썼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5월 5일 5남포동 길다방에서 기다릴게요."


약속을 정한 후 인사하고 돌아서 가는 그녀의 등 뒤에다 대고 나영이 말했다.     


"약속 시간이 언제라 그랬지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미소 띤 얼굴로 "5월 5일 5시요."라 답했다.

그들의 운명적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전 16화 야만시대(野蠻時代)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