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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조기 I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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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Apr 08. 2022

흰구름 먹구름

장편소설

그날

나영의 노래에 홀딱 반한 여학생 세 사람은 기숙사에 돌아와 그 이야기로 꽃을 피웠는데그들 중 가장 새침데기인 백화가 나영에게 먼저 편지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역시, 옛말 중 틀린 말 없었다.     


한편백화가 나영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은 그의 노래 부르는 모습에 반한 것도 반한 거지만, ‘이 사람하고 사귀면 기타도 배우고 노래도 부르고, 참 재밌겠다.’라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이기적인 욕망 때문이었다.

그래서 백화는 가벼운 마음으로 편지를 한 통 보냈다. 그런데 답이 없다. 

'어! 이것 봐라내 편지에 바람을 맞히다니?'  

        

첫 번째 편지에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보다 강력한 미끼로다가 연극 티켓 두 장을 동봉해 보냈다. 한번 만나고 싶다는 강력한 시그날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또 답이 없자 완전 존심이 상했다.

'이거, 뭐야? 남학생들이 목을 매고 따라다녀도 지금껏 콧방귀도 안 뀐 난데지가 뭐라고 내 편지를 이렇게 씹어?'      

백화는 오기가 발동하여 ‘그래그럼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라며 답장 올 때까지 편지를 보내게 되었고 그것은 마침내 나영으로 하여금 제 발로 기숙사로 찾아오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호기심과 욕망으로 시동을 걸고, 오기로 힘껏 액셀을 밟은 백화는 자기가 모는 차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급발진하게 된 것이다.


나영과의 만남은 참으로 재미있고 즐거웠다.

노래면 노래이야기면 이야기, 그를 만나면 서너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고그의 말에는 신뢰가 듬뿍 묻어났으며, 그의 매너는 지금껏 만나본 다른 남학생들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백화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남자가 찌지리 궁상떠는 것이다.     

미팅에서 만난 남학생과 업소를 나올 때자신을 뒤에 세워둔 채 계산대 앞에서 이 호주머니 저 호주머니 뒤져가며 쌈짓돈 꺼내듯 꼬깃꼬깃 접힌 지폐 꺼내놓고 온갖 동전까지 탈탈 털어 밥값 술값 계산하는 꼴을 한 번 보고 나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영과 몇 번 만나는 동안에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나영이 돈을 꺼내 계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 그녀는 무척 당황했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가 되자 나영은 이제 가시지요.” 하며 일어나 백화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갔다그리고는 계산대 앞을 그냥 지나치더니 문을 열고 기다렸다.     


순간백화는 계산대 앞에서 멈칫했다

'아니, 그냥 나가면 어떡하냐? 나보고 계산하란 말인가?' 

백화가 갸우뚱하는 사이 종업원이 웃으며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계산은 저 손님이 이미 하셨습니다.”      


백화는 의아했다. '도대체 언제 계산했지?'    

그다음부터 백화는 나영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리가 파할 때쯤이면 나영이 꼭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었다.

'흠, 이 사람의 마지막 화장실행은 미리 계산하기 위함이었구나.'

    

첫 데이트를 하던 날, 택시를 탔을 때 나영이 보인 행동은 더 인상 깊었다.

택시에서 내릴 때, 나영이 운전기사에게 요금을 치르면서 백화의 눈에 돈이 보이지 않게 지불한 것이다.

'이 사람이 마술까지 배웠나?'     


알고 보면 방법은 간단했다.

남포동에서 영선동까지 기본요금밖에 안 나온다는 사실을 아는 나영은 미리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두 번 접어 위 호주머니에 넣어둔 후, 차에서 내릴 때 그 돈을 손바닥 안에 쥐고 손등을 위쪽으로 한 채 운전기사의 손바닥에 쥐여준 것이다.


나영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거스럼 돈은 그냥 넣어두세요.” 라 말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렇게 하면 서로 돈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먼저 내린 파트너가 밖에서 기다리는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것이다. 나영의 이런 매너는 나이가 들고 경험이 늘어가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 것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에서였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와 데이트를 하면서 남자가 계산하는 모습을 뒤에서 뻘쭘하니 지켜보게 만든다거나, 좁은 택시 안에서 보란 듯이 돈을 주고받으면  돈을 안내는 파트너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불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잘 나가던 그들 사이는 만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검은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서로의 입장과 만남에 대한 인식차 때문이었다.     


백화는 그저 즐겁게 만날 수 있는 남자 친구 하나 사귈 요량으로 다가온 데 반해 나영은 인생을 걸고 덤벼든 입장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단계를 밟아 나아가고 싶은데 그는 느긋이 노닥거리고 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예상보다 빨리, 너무 진지하게 접근해 오는 나영에게 백화는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점점 그에게 빠져드는 자신이 불안했다.


7월 말, 백화는 기숙사 룸메이트로부터 의료봉사를 겸한 농어촌 하계 봉사를 가는데 의대 본과 4학년 학생의 도움이 필요하니 나영과 함께 가면 안 되겠냐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백화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영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밖에 못 만나던 그녀를 며칠 동안 함께 생활하며 매일 볼 생각을 하나 가슴이 설렐 지경이었다.


봉사를 마치고 내일이면 떠나는 날 점심시간, 백화는 나영을 개울가로 불러내어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나영 씨, 대단히 미안하지만, 우리 이제 헤어지기로 해요.”     

순간, 나영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같이 멍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나영이 위 호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고는 말했다.     


"실은 이 노래가 하도 마음에 들어 백화 씨에게 한번 들려주려고 봉사 올 때 가사를 적어왔거든요. 한번 들어보세요."


나영은 낭랑한 목소리로 노랫말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온 지 얼마 안 된 ‘딕패밀리’의 <흰구름 먹구름>이란 노래의 가사였다.

차라리 만나지나 말것을/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마지막으로 보는 당신
왜 이다지도 괴로울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말 한마디/ 
구름처럼 흘러간/ 옛이야기인가/
넓고도 좁은 길 어이가라고/ 너 홀로 둥실둥실 떠나가려나/
말해다오 말해다오 구름아/ 너의 갈 곳 어디


낭독을 끝낸 나영은 

“결국, 이 노래 가사처럼 되고 말았네요.” 하고는 종이를 박박 찢어 흐르는 개울물 위로 휘~ 날려버리고 쓸쓸히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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