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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조기 I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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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Apr 11. 2022

여리고성

장편소설

    

“하느님 아버지, 그 선물 없어도 좋으니 그냥 도로 가져가이소. 내사 마~ 저런 까칠한 선물, 도저히 자신 없습니더.”     


그것은 백화로부터 뜻하지 않은 이별장을 받아 든 나영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날 밤, 나영의 가슴속에선 또다시 힘겨운 전쟁이 벌어졌다.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허망하고, 안 가겠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가기엔 너무 부담스럽고.     

팔딱거리는 자존심은 당장 때려치우라 하는데, 가슴 한켠에선 알 수 없는 울림이 메아리쳐 온다.   

“하늘이 내린 선물을 어찌 그리 쉽게 생각하느냐?”   

  

고뇌의 시간 중에 나영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나를 향한 하늘의 테스트 인지도 모른다. 내가 하느님이라면 아끼는 귀한 신물(神物)을 아무한테나 주겠는가?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끝까지 잘 간직할 그런 사람 고르겠지. 그런 사람 고르려면 테스트는 한번 해 봐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시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봉사를 마친 일행은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그곳에서 잠시 해수욕을 즐기고 가기로 했다. 


물에 들어갈 수 없는 나영은 혼자 남아 백사장에 앉아있었고 백화는 바다로 가서 신나게 놀았다. 나영 혼자 남겨두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못내 가슴 아팠지만 그리해야 나영이 자신으로부터 보다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겠나 싶어서였다.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 땡볕 아래 밀짚모자 하나 덮어쓰고 백사장에 앉아있으니 위에서 쏟아지는 햇볕과 모래에서 반사되어 올라오는 지열로 마치 불가마 속에 든 것 같았다.  


자신은 내버려 둔 채, 보란 듯이 다른 사람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는 나영은 구겨진 자존심과 질투심에 섭섭함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첫 30분은 오기(氣) 때문에 버텼고, 그 후로는 '이 또한 시험일지 모른다.'란 생각에 피하지 않고 견뎠다. 한 시간쯤 지나자 나영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온몸은 땀으로 쩔었다.  


물놀이가 끝나고, 지금쯤 분명 화가 많이 나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다가온 백화에게 나영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잘 놀았어요?" 하고 물었다.

땀방울로 범벅이 된 채 홍시처럼 벌겋게 익은 얼굴로 화난 기색 하나 없이 잘 놀았냐고 묻는 나영 앞에서 백화는 죄책감으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하계 봉사에서 돌아온 나영은 모래사장에서의 사투를 생각하며 또다시 회의(懷疑)에 빠졌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며칠 동안 혼자 자문자답하다 혼자 다짐했다.  


                                                         "간다. 끝까지 간다." 




그 후. 나영은 백화에게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8월 중순에 들어서자 나영은 백화에게 편지를 보내 한번 만나자며 약속 시간과 장소를 통보했다.     

그날, 나영은 미공보원 맞은편에 있는 한 지하다방에서 백화를 기다렸다. 그곳은 백화의 학교 기숙사에서 걸어서 10분이면 올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약속 시각이 되어도 백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나타나기는커녕 다방으로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30분이 지나자 그날 바닷가에서 있었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또 하나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지?”

-그럴 순 없다.- 

    

40분이 지나고, 5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자 또 한 번 시험이 찾아왔다.


“언제까지 기다릴 거야? 참 한심하네!”     

-이젠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럴 순 없다.-


"그럼 어쩔 건데?"

-기다린다. 올 때까지 기다린다!-


다시 10분이 지나자 계단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영은 침을 삼켰다. 하지만 입이 말라 이제 넘어갈 침도 없었다.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였다. 

백화였다.     


그녀가 그 늦은 시간에 다방에 나타난 것은 나영이 가고 없다는 사실을 확인차 온 것이었다. 그래야만 나영과의 이별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백화는 다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영과 눈이 마주치자 놀란 토끼처럼 흠칫하며 그 자리에서 발걸음이 얼어붙고 말았다. 




나영이 택시를 잡아타고 백화를 데리고 간 곳은 그들의 첫 데이트 장소인 ‘아카시아’였다.     

커다란 영도 섬의 절벽 위에 위치한 아카시아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는 그저 그만이었다.


소나무 숲을 관통하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우측 중간중간에 파라솔이 붙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고 

각 테이블 주변에는 싸리나무 울타리가 완벽한 칸막이 역할을 했다.

각 좌석은 서로 적당히 떨어져 있어 큰소리로 말하지 않는 한 옆 데이블에 들릴 염려 없고 전등이라고는 각 테이블 위 소나무에 매달린 희미한 백열등뿐이다. 

본관에 있는 종업원은 손님이 주문한 것 한 번 갖다 주고 나면 그쪽으로는 아예 얼씬거리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나영은 제일 마지막 자리, 벼랑 끝에 있는 테이블로 백화를 안내했다. 절벽 위 숲 속에서 내려다보는 풍광(風光)은 참으로 운치가 있었다. 왼쪽으로는 끝없는 수평선이, 중간에는 자그마한 섬이, 오른쪽으로는 아기자기한 송도 섬과 해변의 불빛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침 저녁 무렵이라 석양 아래 펼쳐지는 하늘과 바다의 오묘한 색채는 긴장하고 굳은 백화의 마음을 포근히 녹이며 첫 데이트 때의 감미로웠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고, 눈 밑으로 지나가는 고기잡이배는 통통거리는 소리로 나영을 응원했다.   

  

맥주가 한 병, 두 병. 나영의 얼굴이 약간 볼그스럼해 질 즈음, 어느덧 해는 지고 하늘에는 둥그런 달이 떠 그 빛의 잔해(殘骸)가 바다 위에 반짝였다. 나영은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상자 하나를 꺼내며 백화에게 전하며 말했다.


"백화 씨, 며칠 후면 생일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이게 뭔데요?”


“카세트테이프입니다."


백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영을 쳐다봤다.    

 

"실은, 생일 선물로 무엇이 좋을까 고심하다 백화 씨께 바치는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테이프에는 그 노래가 녹음되어 있구요."


나영은 들고 간 기타를 꺼내 들고 튜닝을 마친 후 목청을 가다듬었다.

C 메이저로 시작하는 노래가 달빛 아래 조용히 울려 퍼졌다.   

  

태양이 달을 만나듯 난 널 만났고/ 구름이 바람을 따르듯 넌 날 따랐네 

샘물이 솟아오르듯 정은 쌓이고/ 우리의 가슴엔 사랑이 가득 찼네     


그러고는 A 마이너 키로 바뀌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봄이 가면 겨울도 오겠지/ 웃음이 있으면 눈물도 있겠지     


다시 C 메이저로 바뀐 음은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너와 나 갈 길이 아무리 험해도/ 우리는 웃으며 힘차게 갈거야    

 

한번 오르기 시작한 음정은 내려올 줄 모르고 계속해서 올라만 가면서 나영의 목소리는 점점 처연해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의 것/ 나는 당신의 것     


드디어 정상에 오른 음을 나영은 혼신의 힘을 다해 토해냈다.


주님의 축복이 우리를/ 바~아~추~리~라.     


그리고, 후렴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당신은 나의 것/ 나는 당신의 것/ 주님의 축복이 우리를/ 비~이~추~리~라   




노래를 마친 나영의 눈가엔 달빛 어린 눈물방울이 고였고, 백화의 가슴속에서는 그동안 힘겹게 쌓아 올린 성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성경 <시편>에서 영감을 받아 쓴 이 노래 가사는 어쩌면 앞으로 그들이 걸어가야 할 고난의 여정을 예시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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