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기법 09
# 1980년대 중후반 의과대학 영상의학과 강의시간
내가 맡은 과목은 복부 및 비뇨기계 초음파 진단.
첫 수업시간, 나는 열정적으로 강의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영상의학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선이 화면에 가 있는 시간보다 책상 위에 가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는 점이었다.
뭐 한다고 그러나 싶어 보았더니 모두가 필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 때는 학생들에게 배포되는 강의록이란 게 아예 없었다.
하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학생들의 간청으로 PPT로 된 강의록을 PDF 파일로 넘겨주어 수업시간에는 모든 학생이 프린트로 된 강의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가장 중요한 영상을 보는 대신 마치 속기사라도 된 양 내 말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참으로 한심했다.
이게 다 초· 중· 고 12년 동안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창의적 교육 대신, 학생들 머릿속에 있는 지식 없는 지식 다 쑤셔 넣고 그놈들 달달 외우게 만들어서는 시험에서마저 정답 찍기 식 객관식 문제만 내 온 결과 아니겠나!
# 다음 시간
나는 수업 시작 전, 화면에 아래의 영상을 띄웠다.
"이 사진은 1945년 8월 14일(미국 시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날, 일본 국왕의 항복선언 육성이 전파를 타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감격에 겨운 뉴욕시민 수만 명이 타임스퀘어 광장으로 뛰쳐나와 환호할 때, 한 수병과 간호사가 감격에 겨워 키스하는 정면을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라이프'지 기자가 포착하여 표지사진으로 올린 것입니다. 그 후 이 장면은 가장 감격적인 세기의 키스신이 되어 수많은 패러디물까지 낳았지요."
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화면을 응시했다.
"자, 이제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연인 사이일까요? 아니면 모르는 사이일까요? 1 분을 주겠습니다. 답은 사진 속에 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키득거려 가며 지네들끼리 설왕설래했다.
"자, 연인 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그러자 1/3 쯤 들었다.
"모르는 사이라 생각하는 사람?"
역시 1/3 쯤 들었다.
"나머지, 손 안 든 사람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들게 해서 연인 사이(A)에 손 든 사람 세 사람과 모르는 사이(B)에 손 든 사람 세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두 팀으로 나누고는 말했다.
"자, 지금부터 토론 배틀(battle)을 실시한다. 먼저 A팀에서 한 사람 나와서 왜 연인사이인지 설명하면 B 팀에서 한 사람 나와서 그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고, 다시 A팀에서 한 사람 나와 그 논리에 대해 반박하거나 다른 소견으로 설명하면 다시 B팀에서 한 사람 나와 반박하는 식으로 팀 전원이 참여한다."
배틀이 진행되는 동안, 앉아서 지켜보던 학생들은 아주 흥미진진해했다.
토론이 끝난 후 나는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먼저, 여자의 허리 각도를 한번 보세요. 완전히 확 꺾였지요? 그에 따라 오른쪽 다리도 꺾였고. 연인사이 치고는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자의 왼 팔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연인 사이라면 당연히 남자의 등을 끌어안아야 할 텐데
자신의 허벅지 쪽에 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아주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두 사람의 손 모양을 잘 보세요. 세상에 어떤 연인이 감격에 겨워 키스하면서 주먹을 쥐고 한답디까?"
"그래서,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나의 결론은 '이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다.'였습니다. 흥분한 다혈질의 남자가 너무 감정에 북받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던 여자를 끌어안고 키스세례를 퍼부은 것으로 추정했지요.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영상의학이란 엑스레이나 초음파를 인체에 투사하여 인체 내부의 장기를 투과하거나 반사되어 만들어 내는 영상을 보고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약물 치료할 병인지 수술할 병인지, 죽을병인지 살 병인지를 판단하는 학문입니다. 사진 한 장 가지고 그런 중차대한 문제를 판단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동안 배운 모든 기초의학 및 임상의학 지식에다, 빛과 소리의 물리적 특성과 각종 장비의 작동원리에 관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하나하나 적용하고 분석해 나가야 하겠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수업시간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화면에 비치는 영상들을 보고 내 설명을 열심히 들으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건 왜 저렇게 될까?' '앞엣것과 지금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가지면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땐 서슴없이 손을 들고 질문하세요. 질문이 없는 배움은 말짱 헛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받아쓰기하는 그 유치한 버릇은 제발 버리세요.
그리고, 내 시험 문제는 내 강의를 얼마나 열심히 듣고 얼마나 이해했느냐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단순히 외워서 쓰는 문제는 절반도 안 나온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알겠습니까?"
앞으로는 외워서 답을 내는 것은 A.I라는 비서에게 맡기면 된다.
이제 사람이 할 일은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를 응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는 데 있다.
그러니 학교 수업에서도 암기보다는 이해를, 지식보다는 지혜를, 먹이를 먹여주기보다는 먹이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데 보다 치중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은 머지않아 A.I의 종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