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나노
# 1973/4년 겨울
의대 보칼 그룹인 Medical Four 4기의 성공적인 데뷔 후,
우리는 부산에서 열리는 대학가 축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청 그룹이 되었다.
음악팀을 구성 인원 수로 분류하면 솔로, 듀엣, 트리오, 및 그룹사운드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엘렉트릭 사운드를 기반으로 하는 그룹사운드의 가장 큰 애로점은 악기 옮기는 일이다.
통기타보다 훨씬 무거운 엘렉트릭 기타에, 드럼 세트에, 엠프에, 스피커까지.
이 전부를 용달차에 옮겨 싣고 공연장에 도착하면 내려서 다시 옮기고.
공연 마치고 나면 다시 싣고 와 다시 내리고.
그러고 나면 다들 녹초가 되어 공연 후 뒤풀이하러 가는 것은 당연한 관례가 되었다.
운명의 그날, 우리는 한 여자대학에서의 초청공연을 마치고 고된 노가다 작업을 끝낸 후 부산대 병원 근처에서 한잔했는데 그날따라 다들 발동이 걸려 일차에서 끝내지 않고 보수동 ‘개다리 거리’까지 진출했다.
지금은 보수천이 복개가 되어 있지만, 당시는 하천 위에 다리가 하나 놓여있어 그 위로 건너 다녔고, 다리 주변 하천가에는 개 잡는 집이 많아 그 일대는 ‘개다리 거리’란 별명으로 불렸다.
술집을 찾아 그 일대를 어슬렁거리던 중 우리는 한 허름한 이 층 목조건물의 상단에 ‘고양이를 사고팝니다’라는 요상한 상호를 보게 되었다. 개다리 거리에 고양이라니? 이제 고양이도 잡아먹나??
다들 '저기가 뭐 하는 곳이지' 하는 호기심과 함께 무언가 분 냄새가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한 멤버가 잽싸게 나무 계단을 올라가 문을 빼꼼히 열고 들여다보았더니 싸구려 한복을 걸친 여자들과 막걸리 주전자가 보여 직감적으로 무허가 ‘니나노 집’이라는 걸 알았다.
니나노* 집이란 술 따르는 여자란 뜻의 ‘작부(酌婦)’란 이름으로 불리는 한복 입은 여자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면서 젓가락 장단에 맞춰 다 함께 뽕짝 메들리를 부르며 노는 집을 말했다.
우리는 거기 들어가 그날 받은 개런티로 신나게 놀았다.
노래가 전문인 싱어에다 두드리는 거라면 따라올 자 없는 드러머까지,
아예 딴따라 팀 풀세트가 들어갔으니 노래며 젓가락 장단이며 오죽이나 잘 부르고 잘 두드리고 잘 맞추고 잘 놀았겠는가?
“오~늘~~~도오오오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발~~길”
“쿵짜자쿵짝 쿵따라닥닥 삐약삐약."
“지~이~나아아온~ 자우욱 마아아아다~~ 눈무울 고여어어었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앗사라비야 쿵작쿵작 "
“언니~~, 안주 한 사라.”
(이 말이 나오면 바가지 씌울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다.)
11시 반이 넘자 전부 술이 거나하게 되어 술집을 나와 여관을 하나 찾아 들어갔다.
빈 방 하나에 들어가 각자 자리를 잡으려는데 주인과 숙박비를 흥정하러 간 친구가 씩씩대며 돌아왔다.
무슨 일로 틀어졌는진 모르지만 흥분한 그는 "에이 시벌, 여기 아니면 어디 여관이 없나? 마~ 다른 데로 가자!" 하며 도로 나가는 게 아닌가!
“야! 12시가 다 됐는데 가긴 어디로 간단 말이고?”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그날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통금 위반
우리가 그 집을 나와 바로 길 건너편에 보이는 여관으로 가기 위해 길을 건너려는 순간,
“애~00, 애~~ 앵~~” 하는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때가 정각 12시였던 모양이다.
우리는 서둘러 길을 건너 여관 코앞까지 왔다.
그러자 어디서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 “삐~~ㄱ, 삐~~ㄱ” 하는 호각소리가 들리면서 야경꾼(夜警, night guard) 몇이 쏜살같이 달려와 우리를 ‘통행금지 위반’이란 죄명으로 체포하였다.
아무리 상황을 설명해도 그들은 한 건 올리는 데만 눈이 멀어 무조건 파출소에 가서 얘기하란다.
결국, 우리는 보수동 파출소로 잡혀갔고 한두 시간쯤 파출소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더니 드디어 시커먼 ‘닭장차’가 나타났다.
그 차는 범죄자들을 호송하는, ‘미션 임파서블’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창문 없는 시커먼 승합차로서 데모가 한창이던 그 시절 학생들에겐 ‘닭장차’로 불렸다.
우리는 그 차에 실려서 중부 경찰서로 끌려가 유치장에 수감되었고 나는 난생처음 유치장이란 곳에서 하룻밤을 묵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유치장의 밤
때는 겨울.
몇 평 안 되는 좁은 공간에 30명 정도나 되는 인원이 다닥다닥 붙어
시멘트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한밤을 지새워야 했다.
한쪽 벽면 바닥에는 기다랗게 홈을 파서 도랑처럼 생긴 구조물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오줌 누는 곳이었다.
남녀가 뒤섞여 수감되어 있는 곳에서 남자들은 남들 보는 앞에서 소변을 보아야 했고 유치장 안은 지린내가 진동하였다.
그 벽 위쪽에 있는 유리창 중 하나는 깨어져 있어 찬바람이 사정없이 들어왔고
유치장 중간에 있는 난로는 그저 장식물로 놔뒀는지 아무런 온기가 없었다.
그 공간에 잡혀 들어온 인간 군상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술에 취해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 그 속에서 시비 붙는 사람, 토하는 사람,
그 와중에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자는 노숙자 같은 사람,
행상 아줌마, 약간 맛이 간 정신이상자 등등.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들 중엔 일부러 잡혀 온 사람들도 있었다.
노숙자의 경우 추운 겨울날 밖에서 자다간 얼어 죽을 수 있으니 유치장을 잠자리 삼아 들어오고,
먹거리 행상 아줌마는 그날 팔다 남은 것 떠리미(‘떨이’의 경상도 방언, sold out) 하러 들어왔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갈증과 허기가 나서 달걀이며 과일이며 그 아줌마에게서 사 먹었고
그녀는 얼마 안 가 '떠리미'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그날 밤 내가 유치장 안에서 본 모든 것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라 5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잊지 못할 장면은 정신이상자로 보이는 한 청년의 행동이었다.
그는 허리춤에 나무칼 같이 생긴 막대기를 차고는 유치장 중간에 있는 난로 위로 뛰어올랐다.
(그가 유치장 안에서 그런 물건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풀지 못한 미스터리다.)
그는 ‘여러분!’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는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좌중을 쓰~윽 훑어본 후,
허리춤에서 막대기를 빼내어 위로 치켜들고는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경건한 자세로 불렀다.
(내가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는 사람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인지라 그가 존경스럽게까지 보였다.)
애국가를 다 부른 후, 그는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 연설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날 연설 중 한 마디는 생생히 남았다.
그는 나무칼로 그의 발밑에 있는 난로를 가리키며
"여러분! 불도 때지 않은 이것이 난로(煖爐)입니까? 냉로(冷爐)지! 이러고도 대한민국이 어쩌고 저쩌고…."
(나는 그때 난생처음 냉로라는 말을 들었고 그 후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용어는 들어본 적이 없다)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우대도 멀쩡한 청년이, 머리에 든 것도 많아 보이는 청년이, 어쩌다 저리 되었을까?
너무 유식해서 돌았나? 너무 순수해서 돌았나?
드디어 지옥 같은 하룻밤이 지나고 동이 터 왔다.
철창 바깥이 분주해지더니 한 경찰관이 나타나 소리쳤다.
"자! 지금부터 화장실 갈 사람과 전화 걸 사람들 차례로 나와!"
이 시간이 지나면 이젠 큰 닭장차에 실려 법원으로 넘어가
거기서 ‘즉결(卽決)’ 혹은 ‘즉심(卽審)’이라 불리는 간이 재판을 받게 된다.
죄목은 ‘경범죄’ 중 ‘야간 통행금지법 위반’.
형벌로는 벌금형이 떨어지는데 그 돈을 못 내면 구류(拘留)를 살아야 했다.
* ‘니나노’의 어원: (나무위키)
원래는 우리나라 관악기의 소리를 본떠 신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판소리에서 창을 할 때 신난다는 표현으로 많이 썼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신민요 태평가의 후렴이 '니나노 늴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였고 이는 그 당시 꽤 유행하며 많이 알려졌다.
여기서 파생되어 술집에서 흥이 나 부르는 노래란 의미로도 쓰였고, 여기서 약간 더 변형되어 술집에서 시중드는 여자를 나타내는 의미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