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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Jun 18. 2022

인II 01 야사(野史) 속의 뿌구리

기지(機智)의 힘

조선시대,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世界最貧國) 중 하나였는지라 춘궁기(春窮期)에는 먹을 것이 없어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을 정도었다. 이런 먹을 것도 부족한 나라에 술까지 대부분 쌀로 만든 것이다 보니 심한 흉년이 들 경우 어명(御命)으로 금주령(禁酒令)을 내린 적도 종종 있었다.


 또한, 임금 중에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사는 형편과 민심을 직접 살펴보는 잠행(潛行) 내지는 야행(夜行)을 한 사람도 몇 명있는데, 아래의 이야기는 어느 임금님의 야행과 금주령에 얽힌 에피소드라 한다.


 뿌구리 이야기

어느 해 나라에 심한 흉년이 들자 임금님이 금주령을 내렸다. 일단 금주령이 내려지면 술 마시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술을 담그지도 말아야 했다. 금주령을 내린 임금님은 자신이 내린 영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야행에 나서 한강 이남까지 내려가 주막이나 술집거리를 다녀 보았지만 어느 한 곳도 어명을 어기는 집이 없었고 술 마시는 사람도 보지 못해 흐뭇한 기분으로 해 질 녘에 나루터에 도착했다.    

 

임금은 피곤하기도 하고 배도 끊겨 하룻밤 묵어갈 양으로 주막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자 평상에 봇짐을 내려고 집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다가 주인이 거하는 내실 봉창 문이 조금 열려 있어 자신도 모르게 그만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주인이 술을 가지고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임금님은 지금까지 좋았던 기분이 싹 달아나 버리고 실망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임금은 '어명을 어기면 바로 사형이거늘, 이놈을 대체 어찌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며 한참 주변을 서성이다 주막 안으로 다시 들어갔더니 그사이에 제사가 끝났는지 주인이 손님을 맞는다. 임금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주인을 상대로 슬슬 유도신문을 시작하였다.     


"임금이 덕이 없으니 하늘도 노해서 이리 흉년이 들어 고생이지요?!"

"아니 무슨 그런 망발을! 요새 임금님이 어떤 분이신데 당신이 그딴 소리를 하는 게요?"   

  

"그래요? 당신이 임금을 그렇게 존경한다면 어명은 왜 어겼소?"

"무슨 소리요?"     


"실은 내가 본의 아니게 당신 제사 지내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술을 가지고 지내더이다.
 어명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랬소?"

그러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다음과 같은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생전에 워낙 술을 좋아한 사람이라 아버지 제사를 지내면서 술 한 방울 바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송구스러워 그는 고심 끝에 묘안을 하나 짜내고 실행에 옮겼다. 그때부터 그는 길을 다니면서 길거리에 떨어진 곡식 낱알 하나라도 있으면 주워담아 1년 동안 한 바가지 분량의 쌀을 모았다. 그것으로 그는 술을 담아 오늘 제사를 지낸 후 그 술은 마시지 않고 방금 강물에 버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임금이 들어보니 비록 어명은 어겼지만,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복하고 그가 술을 마시지 않고 버렸다는 점을 높이 사, 이건 벌을 줄 것이 아니라 상을 줄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명을 어겼다고 상을 내린다면 그 또힌 말이 안 되는 처사라 혼자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오?"     


그러자 그는 꼴에 관직을 한 번 하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다.

임금은 속으로 '옳거니!' 하면서 지필묵을 가져오라 하였는데, 주인은 지필묵은 없다며  대신 창호지와 숯을 하나 가져왔다. 임금은 그 종이에 새 한 마리를 그리고는 "이것은 봉새(봉황)다." 하고 가르쳐 주었다. 그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임금은 잠을 자러 가게 되었는데 혹시 싶어 "아까 내가 가르쳐 준 것이 무어라 하였지요?" 하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알고 보니 이 사람 기억력과 암기력이 수준이하라 임금은 큰일 났다 싶어 밤새도록 그를 그림 앞에 앉혀두고 "이것은 봉새다. 이것은 봉새다." 하면서 주문 외우듯 과외공부를 시켰다.

다음 날 아침, 임금은 그에게 마지막으로 묻고 '봉새'라는 답을 듣자 다음과 같이 말한 후 궁으로 돌아왔다.     

"모월 모일 모시에 한양으로 한번 올라오시게. 그러면 과거가 열릴 것이니 꼭 그 시험을 치시게나."



드디어 그날, 그는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에 응시했다.

그날 치른 과거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임금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여는 임시 과거였는데 등급으로 치면 생원 정도의 하급 관리를 뽑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그날 과거는 아주 특이했다. 문제란 것이 창호지 조각에 이상한 그림을 하나 그려놓고는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거였다. 


응시생들이 보아하니 뭔가 새 비슷한 놈을 그려놓았는데 임금님 그림 솜씨가 영 신통찮았는지 도무지 무얼 그려놓은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여, 답 중에는 참새, 독수리, 꿩, 기러기 등 조류까지는 나왔으나 봉황새는 나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허접한 새가 봉활일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 주막집 주인 차례가 되었다.

시험관이 그림을 내놓고 "이게 뭐지?" 하고 물었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그건 바로 그날 밤 어떤 나그네가 그려 보였던 바로 그 그림 아닌가! 그는 속으로 '이런 횡재가 어디 있냐?'며 막 대답하려는 순간, 답이 입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 도무지 입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발을 쳐 놓고 상좌에 앉아서 보고 있던 임금은 애가 탔다. 그렇다고 해서 답을 가르쳐 줄 수도 없고…. '아이고, 답답한 인간아! 그 말 한마디 나오기가 그렇게나 어렵냐?' 임금은 가슴을 쳤다.

시험관이 참다못해 "모르겠으면 나가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엉겁결에 한 마디 내뱉었다.     

"뿌구립니다."     

시험관은 ”뿌구리?“ 하며 이 웬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틀렸으니 나가라고 명했다. 임금은 ”내가 밤새도록 그토록 과외를 시켰건만, 그걸 하나 기억하지 못하다니. 저자의 팔자에 관직은 없는 모양이다….“ 하며고 혼자 탄식하였다.


주막집 주인은 궁에서 나온 후 낙담하여 걸어가다 장터에 다다르자 그제야 봉새라는 사실이 떠올랐고 너무 억울하고 원통한 나머지 땅바닥에 퍼질고 앉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러자 나이도 적지 않은 사람이 대낮에 땅바닥에 주저앉아 슬피 통곡하는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이를 괴이히 여겨 그를 데리고 주막에 들어가 술을 한 잔 사 주면서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그는 마치 꿈만 같은 그날 밤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러자 그 남자는 "여기서 좀 기다리고 있으시요." 하고는  히 궁으로 달려가 마지막 응시생으로 들어갔다. 시험관이 그 그림을 내놓고 "이게 무어지?" 하고 묻자 그는 아주 자신 있는 어조로 "이거 뿌구리 맞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사실 시험관도 임금이 ‘봉새’라 해서 봉새인 줄 알 뿐 이런 봉새는 머리털 나고 처음 본 터에 이 사람이 너무나 자신 있게 ‘뿌구리 맞다!’라고 하니 틀렸다 말 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임금이 한 번 봉새라 했으면 비록 봉새가 아니더라도 봉새가 되어야 하는 법, 시험관은 "틀렸으니 나가시오." 하고 말했다.     


한편, 발 뒤에서 실의에 젖어있던 임금님은 뿌구리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아까 주막집 주인도 ‘뿌구리’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을 했는데, 이 사람은 아예 ‘뿌구리 맞다라고 까지 하니 여기엔 필경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금은 시험관에게 그 사람을 다시 들게 하라 명하고 그에게 ‘뿌구리’가 도대체 무언지 물어보라고 하였다. 시험관이 급히 그를 불러 뿌구리가 무언지 물어보자 그는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봉새의 할애비가 뿌구립니다."

     

그러자 임금이 무릎을 '탁' 치면서 다음과 같이 명했다.

"옳거니! 내가 봉새를 문제로 냈는데 이 사람은 봉새 뿐 아니라 봉새 조상의 이름까지 알아맞혔으니 앞서 나간 사람과 함께 두 사람을 합격자로 하라!"     


이리하여, 양심적이고 기지가 넘치는 한 사람 덕분에 두 사람이 다 관직을 했다는 믿기 힘든 재미난 이야기가 우리네 야사 속에 전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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