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大衆)의 실체
뿌구리 선생님
# 1969년 봄, 고교 2학년 국어시간
새로운 국어 선생님이 시골에서 부임해 오셨다.
나름대로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었지만 양복의 색상부터 시작해 촌티가 폴폴 났고
생김새는 아주 독특했다.
선생님은 첫 시간이라 수업 준비가 안되었으니 오늘은 수업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해,
다들 책을 덮고 환호했다.
그날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서양판 '토끼와 거북이',
다른 하나는 '뿌구리' 이야기였는데 그중에서도 뿌구리 이야기는 완전 히트작이 되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뿌구리가 뭔지 궁금했던 우리들에게 그 선생님의 독특한 생김새는 뿌구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날 부로 선생님은 인기 만점의 '뿌구리 선생님'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회지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골 중학교 선생님의 짧은 실력이 드러나면서 수업은 엉망으로 진행되었고 인기 짱의 뿌구리는 원망과 조롱의 뿌구리로 변해갔다.
그러자 선생님은 점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가며 수업 중 질문도 못하게 하고, 그래도 질문을 하는 경우에는 말꼬리를 잡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 후로 그 수업시간은 마치 절간에서 스님 혼자 염불 하듯 정적 속에 진행되었고 학생들은 몰래몰래 다른 과목 책을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비석의 '산정무한(山情無限)'에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광란(狂亂)의 수업시간
산정무한은 정비석 작가의 기행문으로서 문장이 수려하기 그지없으나 학생들에겐 난해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이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아주 실력 좋은 국어 선생님을 담임으로 맞아 그동안 국어에 재미를 붙이고 열심히 해왔다.
그런 나에게 뿌구리 선생님의 산정무한 풀이는 수긍하기 힘든 때가 많아, 한 번은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서 어떤 한 문장에 대한 나의 해석과 선생님의 해석을 내놓고 어느 것이 맞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나의 해석이 맞다는 담임 선생님의 대답에 힘을 얻은 나는 잘 못 된 줄 뻔히 알면서 선생님이 무서워 눈 감고 입 닫고 지낼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온 국어 시간, 선생님의 황당한 풀이에 참다 못 한 나는 분연히 일어나 날카로운 질문의 화살을 날렸고 답변에 궁한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쩔쩔맸다.
사라예보에서의 총성 한 방이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였듯, 나의 질문 한 방은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학생들의 불만에 순식간에 불을 지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여기저기서 도미노처럼 질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갈수록 코너에 몰린 선생님은 "지금까지 질문한 놈들 다 나와!"라고 소리치고는 학생들이 나오는 족족 손바닥과 주먹으로 때리고 미친 듯이 발로 찼다.
급기야, 사타구니를 걷어 차인 한 급우가 그대로 앞으로 꺼꾸러 지면서 앞 줄에 앉은 나에게 벌벌 기어와 숨이 막힌다며 연필깎이 칼을 달라고 사정했으나 그의 의도를 오해한 나는 겁이 나 주지 않았다.
그러자 숨이 턱 막혔을 때 하는 민간요법을 알고 있던 내 옆에 앉은 친구가 그에게 칼을 건네줬고 그는 그 칼로 자신의 손가락 끝을 찔러 피를 냈다.
선생님이 질문한 아이들 다 나오라 했을 때 나는 눈이 휙 돌아간 광기 어린 선생님을 보는 순간 '내가 미쳤나? 저런데 나가서 개 맞음 하게?' 하며 그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다행히 그 선생님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 정작 죽도록 패주고 싶은 놈은 나라는 사실마저 까먹은 모양이었고 한바탕 미친년 널 뛰 듯한 광란의 폭력을 자행한 선생님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공포의 취조
선생님이 나가고 나자, 두들겨 맞은 친구들은 마치 폭격 맞은 전쟁터의 부상병처럼 울며 절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고, 교실에는 '이제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공포의 긴장감이 새벽안개처럼 휘감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훈육주임인 우리 담임 선생님이 손에 막대 걸래 자루로 만든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 우리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오늘 국어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는 선생님의 추궁에 폭행당한 아이들도, 뒷줄에 앉아 평소에 형님처럼 굴던 덩치 큰 녀석들도 말 한마디 못하고, 반을 대표하는 반장이란 녀석은 그저 잘못했다는 소리만 연발하며 용서해달라고 빌기 바빴다.
학생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반장의 비굴한 태도에 나는 '저 자석 미쳤나? 도대체 우리가 무얼 잘 못 했는데?' 싶어 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 할 말 있습니다."
일순,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리고 긴장감은 더욱 높아갔다.
(나중에 들으니 '내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까?' 하는 생각에 다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한다.)
나는 그날 상황뿐 아니라 그동안 그 수업시간에 일어났던 모든 사태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해 나갔고, 상황 설명을 마친 나는 선생님께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했다.
"선생님께서도 조사를 더 해 보신 후, 만약 저희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단되면 저희를 벌하여 주시고 그 선생님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시면 학교차원에서 대책을 세워주십시오."
뿌구리 선생님이 고양이라면 우리 담임은 백두산 호랑이 급이다.
이제 그런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다들 가슴이 오그라 붙는데 예상치 못 한 놀라운 반응이 나왔다.
선생님은 내 말이 끝나자 화를 내기는커녕 고개를 푹 숙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지금은 학기 중이라 어쩔 수 없고, 2학기엔 다른 선생님으로 바꾸도록 해 볼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담임 선생님도 이 선생님의 실력이나 수업 분위기에 대해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던 차에 국어 선생님이 씩씩대며 교무실로 들어와 반 학생들 교육 똑똑히 시키라며 강력히 항의하자 순간 열이 받아 몽둥이까지 들고 들어왔지만, 실은 수업 실상에 대해 우리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 교장 선생님께 당당 과목 교사 교체를 건의할 명분이 서지 않겠나!
결국, 2 학기엔 2학년 담당 국어 교사가 다른 선생님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중(大衆)의 실체
그날 일을 겪으면서 내 마음속에는 다음과 같은 강한 의문이 들었고, 그로부터 5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한 번씩 똑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군중은 왜 이리 나약하고 비겁한가?"
* 뿌구리 *
강이나 개울에서 흔히 보는 길이 10~20 cm 정도의 물고기.
뿌구리, 꾸구리, 뚜구리, 뽀구리, 동사리, 꾹저구, 멍텅구리 등, 지방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게 불려 딱히 정해진 이름이 없는 별 족보 없는 민물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