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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환규 Aug 19. 2023

과학에 국뽕이 침투하면 벌어지는 일

정치적 이념이 무너뜨리는 의료

예전에 북한의 축구 용어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북한에서는 핸들링 반칙을 '손 다치기', 롱 패스를 '장거리 연락', 오프사이드를 '공격어김' 등으로 부른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슛'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를 제외한 모든 축구용어를 한글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외세를 배격하는 북한의 주체사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의학계에도 남북한의 통일을 대비해서 의학용어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의학용어사전 편찬은 의학용어의 한글과 운동으로 바뀌었다. 환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현재 영어와 한자 중심의 의학용어를 한글화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생겨난 의학용어들을 살펴보자.


막창자꼬리염(충수염)

심방잔떨림(심방세동)

잘록창자보개검사(결쟁내시경)

토리콩팥염(사구체신염)

넙다리뼈(대퇴골)

덧대(스텐트)

복장뼈(흉골)

사슬알균(연쇄상균)

방패샘(갑상선)


용어는 언어 중에서 단어의 하나이고, 언어와 단어는 여러 사람들에 의하 사용될 때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위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의학용어의 우리말 작업은 이 한글과 작업에 참여한 소수의 의사들의 머리속에 들어있던 상상력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또한 한자로부터 벗어난다고 했지만,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므로 위에서 예시된 용어만 하더라도 창자, 심방, 복장 등의 한자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자표기는 어느 새 우리말 깊숙히 들어와 자리잡은 우리말이 된 것이다. 그런 우리말을 배격하고 '순수우리말'을 고집하는 소수의 집단이 '우리'라는 국뽕에 취해 한글화 작업을 밀어붙였다.


그런 활동이 한편 필요한 일이고 나름의 가치가 있는 일임에 동의한다. 그러나 문제는 소수의 머리속에서 나온 이런 우리말 표현이 의학교육에 강제화되었다는 점이다. 의학회가 우리말 표현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은 의사국가고시 시험이었다. 십수년 전 한 때 의사국가고시 시험에 그 동안 사용되던 의학용어가 사라지고, 순수우리말로 표기된 의학용어만이 등장했다. 우리말 의학용어의 사용이 권고가 강제화된 순간이었다. 영어로 된 의학용어를 외우기에도 벅찬 의과대학생들은 영어를 버리고 한글화된 용어를 공부해야만 했다. 해외에서 공부를 하다가 들어온 의대생들은 순수우리말이 어려워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예상되었던 참담한 일들이 발생했다. 의사들이 의학 원서를 읽지 못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한 때 세브란스병원 후문 앞에 의학서적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작은 서점이 있었다. 가끔씩 찾던 곳이었는데, 한 번은 오랫만에 방문했더니 영문 원서들이 가득했던 책장이 한글로 된 서적으로 가득차 있었다. 서점의 주인께 "요즘은 의학책들이 한글로 많이 나오나봐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서점 주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게 우습지만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의학용어들이 다 한글화가 되어서 학생 때부터 그렇게 배우니까, 의사가 된 후에도 우리말 책만 찾아요. 영어 원서를 전혀 읽지 못합니다. 전공의들이 읽어야 하는 전공서적도 번역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원서를 사지 않아요. 읽지를 못하거든요."


의학은 수백년 전 고대학문을 다루는 한의학과 전혀 다른 학문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1년 전의 의학상식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단 번에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 의학이다. 의학은 과학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발전하고 다듬어지고 고도화된다. 바로 그것이 의학이 최신의학지식을 중요시하는 이유이고 의사들이 최신의학지식으로 무장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최신의학지식으로의 무장은 전문지식인들 사이의 끊임없는 교류와 지식의 습득 능력을 갖춰야만 가능하다. 그 어느 때보다 지식 습득이 수월한 시대를 살면서, 소통과 지식습득의 능력을 스스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의사국가고시는 '어렵고 혼란스러운' 의학용어에 대해서는 괄호표기로 영어를 부기로 다는 방법으로 바꾸었지만 의학용어의 한글화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의학교육에 적용되고 있다. 이 배경에 "우리 것이면 뭐든지 최고"라는 이른바 '국뽕'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최근 의료계를 뒤흔든 두 개의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하나는 한의사의 초음파검사 행위에 대해 무죄를 내린 판결이고, 또 하나는 한의사의 뇌파검사 행위에 대해 무죄를 내린 판결이다. 


한의사의 초음파검사 행위에 대한 무죄 판결의 내용은 2년 동안 68회의 초음파 검사를 하(는척 )면서 자궁내막암 진단을 놓친 한의사에게 대법원이 1,2심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한 것이고, 한의사의 뇌파검사 행위에 대한 무죄 판결은 뇌파로 치매와 파킨슨씨병을 진단한다고 광고를 낸 한의사에게 보건소가 내린 행정처분이 부당하고 한의사는 무죄라고 판결한 것이다.


초음파 검사와 뇌파 검사는 한방의 원리와는 거리가 매우 먼 전혀 다른 원리에 의한 의학적 검사 방법이다. 뇌파 검사 역시 한방의 원리와는 전혀 무관한 검사 방법이며 의사중에서도 뇌파검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신경과 전문의 외에는 다룰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데 대법원의 판사들이 나서서 "한의사들이 초음파 검사도 할 수 있고 뇌파 검사도 할 수 있다고 환자를 유인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법적 판결을 내린 것이다. 유독 최근 들어 대법원이 비상식적인 판결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한방에 우호적인 판결을 연달아 내리고 있는 것은 문재인 정부 아래 대법원이 좌파성향의 인물로 구성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판결의 배경에 국뽕이 작용한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에 의사들이 강하게 반발했지만, 사실 대법원의 판결에 분노해야 할 사람들은 의사들이 아니다. 엉터리 진료에 의해 피해를 입게 될 일반 시민들이고 환자들이다. 의사들은 학자적 양심과 전문가적 가치에 반하는 법원판결에 분노할 뿐이지만, 냉정히 보면 그 판결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사람들은 의사가 아니다. 따라서 의사들은 분노할 이유가 없다. 그저 과학에 국뽕이 침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무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면 될 일이다. 이런 글이나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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