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스며든 미소
“이제 낭자께선 향낭을 찾으셨고,
전 제 할 일을 마쳤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윤재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향낭을 작고 하얀 서화의 손에 쥐어주고 몸을 돌렸다.
한 발, 두 발. 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려는 찰나—
서화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저… 도련님!”
윤재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저,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처음 발을 디딘 낯선 거리.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눈앞의 그뿐이었다.
비록 그의 태도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서화는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조심스레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 싫습니다.”
“… 예?”
“제가 낭자 덕분에 아직 조조 수련이 덜 끝났습니다.”
“… 지금… 진심이십니까?”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서화는 멍하니 서 있다가,
윤재가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바닥을 툭 찼다. 그러곤 이를 악물고 혼자 힘으로 벗어나겠다고 마음먹은 듯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약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이 길을 잃었다는데… 그걸 그냥 두고 간다는 게 말이 돼? 정말 약 올라!’
투덜거리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놀라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멀어지던 윤재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 곁에 서 있었다.
“… 어찌 오셨습니까.”
“이미 조조 수련은 못 할 듯하고,
혹여 낭자께서 또 담장 안을 보시다가
길을 잃으실까 하여 따라왔습니다.”
“도련님은… 언제까지 그 일을…”
“걱정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입꼬리에 살짝 걸린 그의 미소는 여전히 얄미웠지만,
눈빛은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저… 월촌에 가려던 길이옵니다.”
“월촌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윤재의 질문에 서화는 잠시 말문이 막혀
그를 바라보았다.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 하자,
자신조차도 이유가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 사실은, 저도 제가 월촌에 가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솔한 고백이었다. 윤재는 그 말에 시선을 멈췄다.
고개를 숙인 서화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송구하옵니다. 그만… 돌아가는 것이 옳겠지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윤재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서화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녀를 보지 않은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보면… 정리가 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 말은 이상하게 마음을 잠잠하게 만드는 울림이 있었다.
“월촌으로 가는 길, 제가 압니다.”
“도련님께선… 한양에 오신 지 며칠 되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 어찌 그 길을 아십니까? 여기서 오래 산 저도 길을 잃었사온데…”
윤재는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원래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한양에 오자마자 구경하며 길을 익혀뒀습니다.”
그의 말에 서화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구나… 어?’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윤재가 웃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순간 정신이 멍해졌던 서화는 괜히 목덜미를 매만지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 별일도 아닌데 왜 이리 정신이 흐트러졌지.’
윤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앞장서 걸었고,
서화는 작게 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골목길은 생각보다 한적했고,
길가의 키 작은 풀들과 들꽃들이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장작 타는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두 사람 사이에는 몇 걸음의 거리가 있었다.
서화는 그 거리를 굳이 좁히지 않았다.
그는 예의는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길을 잘 안다고 해놓고선,
왜 처음엔 ‘싫다’고 했던 걸까.
정말 수련 중이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자신을 놀린 걸까?
서화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은 길만 찾고,
월촌에 가서 알아야 할 것을 확인하면 된다.
그 외의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걷던 중,
삐걱대는 나무문이 줄지어 있는 마을이 드러났다.
‘어휴, 드디어 도착했네.’
서화는 주위를 둘러보다 비탈진 길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을 발견했다.
“그거 내가 먼저 땄다니까!”
“거짓말이야! 내가 산에서 먼저 찾았어!”
“거짓말 아니야! 진짜 내가 땄다니까?!”
아이들은 열매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서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아이들 쪽을 향해 말했다.
“얘들아, 내가 싸우면 안 된다고 했지?”
익숙한 목소리에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 아씨?”
“진짜 아씨다!!”
“아씨—!!!”
아이들은 환한 얼굴로 열매도 내팽개친 채 달려왔다.
서화는 두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얘들아, 내가 너무 오랜만에 왔지? 그동안 잘들 지냈어?”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골목 초입을 가득 메웠다.
멀찍이 서 있던 윤재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서서히 환해지는 그녀의 얼굴.
그녀는 방금 전까지 담장 너머에서 보았던
서늘한 표정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 순간—
서화의 웃음소리, 아이들의 재잘거림,
사이사이 터지는 작은 발소리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든 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마침내 세상이 멈춘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은 것은 단 하나—
햇살 아래 웃고 있는 서화의 모습이었다.
윤재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근데 얘들아, 복돌이는 어디에 있니?”
서화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가장 키가 작은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복돌이 형이요? 잘 모르겠는데요?”
“응? 복돌이는 요즘에도 마을에 자주 내려오니?”
“네! 막동이랑 단이 데리고 매일 내려왔어요!
…어?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는 못 봤어요.”
“그렇구나…”
서화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어제부터 못 봤다’는 말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얼굴에 어렸다.
그때, 아이들 중 한 명이 환하게 외쳤다.
“아씨! 복돌이 형이 그랬어요!
아씨는 꼭 다시 오실 거라고! 근데 진짜로 오셨네요?!”
서화는 아이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약속했는걸?”
그녀는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
그녀의 미소는 더욱 따뜻하게 번져나갔다.
윤재는 조금 뒤편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선을 조용히 거두었다.
‘복돌이… 막동이… 단이…’
그 이름들이 마음 어딘가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방금 전, 서화가 아이 하나하나의
눈을 바라보며 웃던 그 순간이—
아직도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미소는… 도대체 뭐지.’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귀퉁이가 간질거렸다.
그때, 서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얘들아, 혹시 복돌이네가 살던 움막은 아직 그대로 있니?”
“네! 그대로 있어요! 윗산 다랑이 쪽이요.”
“그래? 고맙구나,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아이들이 “예~!” 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서화는 윤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윤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리하지요.”
서화는 다시 한번 아이들에게 손을 흔든 뒤,
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재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해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고,
그림자 드리운 골목 사이로
바람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점차 멀어지고,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조용한 월촌을 채워갔다.
산자락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좁은 오솔길에는 풀잎과 작은 들꽃들이
발목을 간지럽혔고,
군데군데 놓인 돌계단엔 이끼가 내려앉아
미끄럽기까지 했다.
몇 차례 숨을 고른 끝에, 서화가 멈춰 섰다.
“저깁니다… 복돌이네 집은 저기 저쪽에 있사옵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낡은 천막 조각과 삐걱이는 대나무 기둥 몇 개가
기울어진 채 서 있었다.
제 모양을 거의 잃은 자그마한 움막.
바람에 삐걱이는 소리만이 텅 빈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윤재는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서… 아이 셋이 살았단 말입니까?”
“예. 복돌이와… 막동이, 단이. 막동이는 복돌이의 남동생이고, 단이는 여동생이지요. 어미는 쌍둥이를 낳고 곧 세상을 떠났고, 아비는 전쟁터에 끌려간 후 돌아오지 못했사옵니다.”
서화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그래서 복돌이가 동생들을 혼자 돌봤사옵니다.
열도 안 된 아이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지요.”
윤재는 말없이 움막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 꺼진 화롯불 자리, 반쯤 타다 남은 장작 더미,
조심스레 접어둔 낡은 옷가지와 짚신 한 켤레.
모든 것이 작고 초라했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 삶을 애써 붙잡으려 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서화는 조심스레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벽 쪽에 떨어진 작은 수건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이건 복돌이 것입니다!
동생을 위해 항상 깨끗이 씻기려 애쓰던 아이였사온데..”
그녀의 목소리엔 조용한 떨림이 담겨 있었다.
윤재는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녀의 감정은 단순한 연민도,
허울뿐인 시혜도 아니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잠시 후, 서화가 일어섰다.
그녀는 움막을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은 비었지만… 어쩐지, 무너졌다는 느낌은 아니옵니다.”
“무너진 것 같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어딘가로 옮겨간 것 같달까…
흔적이 너무 말끔합니다.
물건들이 그대로인 것도 그렇고...
누군가 정리한 손길이 느껴지옵니다.”
윤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복돌이란 아이는
아직 이 근처에 있을 수도 있겠군요.”
서화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너무 걱정되옵니다...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겼을 텐데..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그녀의 시선은 저 멀리 산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작은 윤곽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윤재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너진 움막보다 더 깊은 울림은—
서화가 아이들을 향해 품고 있는 그 마음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