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틈
그 시각, 안마당ㅡ
연심이는 까치발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안채 작은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이 시각이면 마님이 계신 큰방엔
불이 꺼져 있어야 하는데,
문틈 사이로 어쩐 일인지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긴 연심이는 살금살금 다가가
큰방 문 쪽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다 처리했느냐?”
윤 씨 부인의 목소리였다.
‘처리? 무엇을 처리하셨단 말씀이시지?’
연심이는 숨을 죽인 채 더 가까이 다가섰다.
곧이어 옥련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예, 마님 분부하신 대로 싹 거둬들였사옵니다.”
“그래, 잘하였다. 후... 내가 하나 있는 여식 때문에 늙는구나, 늙어…”
“마님… 아씨께서 아시게 되면… 정말 괜찮으시겠사옵니까?”
“옥련아… 난 서화의 상심보다도, 혹 대감께서 이 일을 아시게 될까 그게 더 두렵구나…”
“마님… 하온데 아씨께서는 어찌 연자근을 찾으시는 걸까요?”
“글쎄… 자세한 속사정은 나도 알 수 없다. 허나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내가 만초방의 연자근을 몽땅 거둬들인 사실은 절대 그 누구에게도 새어선 아니 된다. 알겠느냐?”
“예, 마님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연심이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뭐...? 연자근을... 마님께서? 그걸 어찌 아시고…’
더는 이러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연심이는
급히 안채 작은방으로 달려갔다.
“아씨, 지 연심이구만유! 지 들어가유!”
문을 급히 열고 들어선 연심이는
닫기도 전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풉, 얘! 지금 뭐 하는 거야?”
서화는 마치 고양이에게 쫓기는 생쥐처럼
허둥대는 연심이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안심한 듯 연심이가 그녀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씨, 오늘... 혹시 만초방 가셨어유?”
“무슨 소리야? 연심이 네가 연자근이 있다고
가보라고 했잖아”
“그럼, 연자근은… 찾으셨데유?”
“못 찾았어. 약방 어르신이 아직 못 구하셨다고 하던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연심이 네가
거짓을 말했을 리는 없고..”
연심이는 굳은 표정으로 입술만 뻐끔거렸다.
“예… 맞아유… 지가 그랬쥬…”
“얘가 왜 이래? 연심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서화가 조심스레 묻자,
연심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여요! 지가 잘못 알았나 보구만유…
어휴 지 때믄에 괜히 우리 아씨 헛걸음하셨네…
죄송해유…”
서화는 연심이의 태도가 수상하다는
생각에 더는 넘길 수 없다고 느꼈다.
“연심아, 그런데 너 오늘 하루 종일 어디 있었어?
춘매어멈도 널 못 봤다고 하던데.”
그 순간 연심이의 얼굴이 벌게지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 그게… 잠깐 월촌에 좀 다녀왔고만유…”
“월촌?”
“예, 월촌이유… 어휴…”
“얘, 연심아 왜 그래?
오늘 너답지 않게 왜 이러는 거야?”
“그게… 아씨…”
“말해봐. 뭔데?”
“......”
“연심아!”
서화가 다그쳐 물었지만,
연심이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날 밤, 서화는 연심이의 이상한 행동이
자꾸 마음에 걸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무지 모르겠어… 안 되겠다.
날이 밝으면 나도 월촌에 가봐야겠다.’
결심한 서화는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닭이 울자마자 채비를 마친 그녀는,
부모님께서 기침하시기 전 조용히
집을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대문을 나서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꼭두새벽부터 어딜 가시는 거여유?”
춘매어멈이었다.
“어?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서…”
서화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춘매어멈의 성격을 아는 그녀는
무슨 핑계를 댈지 고심하고 있었는데—
“아~ 그려유? 그럼 조심히 다녀오셔유~”
의외로 가볍게 넘기는 춘매어멈에
서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조용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씨, 혹 마님들께서 물으시믄 알아서
잘 둘러댈 테니 석반 전엔 꼭 돌아오셔야 혀유.”
놀라 뒤돌아본 서화는,
헛기침을 하며 부엌간으로 걸음을 옮기는
춘매어멈을 바라보았다.
서화는 그녀가 곤란해지지 않도록
석반 전에 꼭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월촌으로 향하던 길.
갑자기 어디선가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이런 집이 있었나…”
까치발을 들고 담 너머를 살펴보던 그녀는,
그 안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윤… 윤재 도련님?!”
그만, 마음속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거기 누구냐!”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서화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담장 밑에 몸을 숙이고 앉아서
인사를 해야 할지, 도망쳐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 서화 낭자?”
곁에 그림자처럼 나타난 사람. 윤재였다.
“하하… 윤재 도련님, 안녕하셨지요?”
“낭자께서 이곳엔 어인 일로…”
“그저 지나던 길에 소리가 들려서…
아, 오해는 마세요!
정말 단순히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예,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하하… 그럼 전 이만…”
서화는 머쓱한 웃음과 함께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민망함을 감추듯 앞만 보며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하필이면… 저기가 차 장군님 댁일 줄이야…’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을 걷던 그녀는 어느새
낯선 풍경 앞에 멈춰 섰다.
‘여기가… 어디지?’
서서히 몰려드는 불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을 바삐 움직여보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생전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바스락, 바스락ㅡ
낙엽을 밟는 듯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분명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
서화의 숨이 거칠어졌다.
불안한 예감에 걸음을 재촉하려는
찰나—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꺅!”
서화는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 가까이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조심스레 눈을 뜬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윤… 윤재 도련님?!”
“낭자, 괜찮으시오? 조금만 더 가셨더라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했소이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서화는 아직 빠르게 뛰는 자신의 심장을 느끼며,
그의 품 안에서 얼어붙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뭐지…?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는 거야…’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윤재 도련님의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흠, 낭자.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겁니까.”
속삭이듯 낮고 단정한 목소리에 놀라,
서화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등을 돌렸다.
“도련님… 송구하옵니다. 제가… 무례를…”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걸 돌려드리러 왔을 뿐이지요.”
그가 조심스레 내민 손 위에 놓인 것은—
‘이, 이건… 내 향낭 주머니잖아?
이걸… 도련님께서 어찌…?’
“지금, 제가 낭자의 향낭주머니를
‘어찌 갖고 있나’ 생각하셨지요?”
“예?! 네.. 사실 그리 하옵니다.”
“담장 아래 숨어 계실 때 떨어뜨리신 듯합니다.
돌려 드리려 몇 번을 불렀는데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으시더군요.
그래서 따라오게 됐습니다.”
“숨어 있었다니요! 그건…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허나 저를 보자마자 달아나듯 서둘러 가셨고,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부정하지 않으시겠지요?”
태연하고, 정중한 말로 사람을 몰아붙이는 듯한
윤재를 보며 서화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 예, 그건 사실이지요.”
그의 말투는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았지만,
입꼬리에 얄밉게 걸린 미소는—
보는 이를 당황스럽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