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마음이 닿은 자리

하나의 약속

by 붕어예요

서화는 조심스레 사랑방 앞에 다가서더니,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버지, 서화이옵니다.”


“오냐, 어서 들어오너라~”

끼익—
문을 열고 사랑방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대로 손님이 와 있었다.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
풍채가 크고, 피부는 거무스름한 사내는 인상이

다소 거칠어 보였지만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았다.

“서화야, 인사드리거라. 예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을 게다.
이 아비의 오랜 벗이신 차장군님이시다.”


“처음 뵙겠사옵니다. 소녀 김서화라 하옵니다.”


“허허허! 아니, 그 꼬맹이가 이렇게 자랐단 말이오?
내가 변방에 오래 있긴 했나 보군요.
대감, 길에서 마주쳤다면 못 알아볼 뻔했소이다~”

어렸을 적 만난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화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묘하게 낯익은 기운만은 느껴졌다.
잠시 멀뚱히 서 있는 서화를 향해 아
버지가 말을 이었다.

“자, 둘이 인사 나누거라.
서화야, 이쪽은 차장군님의 아들 윤재도령이라고 한다.”

그 말을 따라 고개를 든 서화는 굳게 다문 입술과
서늘한 눈빛의 청년과 마주쳤다.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엔 묘한 위압감이 어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기조차 조심스러웠다.
마치 단단한 성벽 앞에 선 듯한 기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서화 낭자, 차윤재라 합니다.”


“아… 윤재 도련님, 처음 뵙겠사옵니다. 김서화라 하옵니다.”


“허허허! 대감, 보기 좋은 한쌍 아닙니까?
아이들끼리는 처음 보는 사이이지요?”


“예~ 장군, 그럴 겁니다.
저 역시 오늘에서야 윤재 도령을 처음 보는군요.
장군께서 얼마나 아드님을 꽁꽁 숨겨 놓으셨는지
한 번을 못 봤지 뭡니까~ 하하하”


“아! 그랬던가요? 허허허 이제 내 한양으로 왔으니
앞으로 자주 왕래 하시지요, 대감~”


“좋습니다, 장군. 그리하십시다. 하하하하!

자, 서화. 너도 그리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앉거라.”


“예, 아버지.”

서화는 조심스레 아버지 곁으로 가 앉았다.

하필이면 마주 앉은 이가 윤재 도령이었다.

가까이서 바라본 윤재는 더더욱 차가운 인상을 풍겼다.

눈빛은 날카롭고, 말이 없어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때, 차장군이 서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화가 금년 나이가 몇이지?”


“예, 소녀 금년 열다섯 해이 옵니다.”


“열다섯이라… 시집갈 나이가 되었구나.”


“예…? 시, 시집이요…?”

놀람에 서화의 목소리가 살짝 새어 나왔다.
당황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얼굴.
시집이라는 말 자체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던 그녀였다.

“하하하! 장군, 안 그래도 요즘 딸아이
혼처 자리를 알아보던 참입니다.”

… 혼처 자리? 서화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아버지는 이렇다 할 이야기도 없으셨는데, 느닷없는 혼사라니.
그녀는 아직… 아니,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대감, 그렇다면 저와 사돈을 맺으시는 것이 어떻겠소?
저희 아들 녀석도 장가들 나이가 되었지 뭡니까?
금년에 예닐곱인데, 서화랑 딱이지 않소? 허허허!”


“장군, 장군과 사돈을 맺게 된다면 우리 가문의 광영이지요.
또 딸아이를 시집보내는 아비로서 마음을
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좋습니다!”


“허허허! 대감, 못 뵌 사이 농이 아주 늘으셨습니다.
저희야말로 대제학 집안과 사돈을 맺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광영이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허허허.
그리고 이렇게 꽃같이 귀한 따님을 시집보내주시는데,
아무렴 저희가 극진히 모셔야지요~ 허허허허허.”


“하하하하하!”

사랑방 안엔 웃음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서화의 마음은 무거웠다.
왜 본인의 혼처 이야기인데
정작 본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걸까.
윤재 도령이 지아비가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 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대감마님. 궐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궐에서? 그래, 알겠네. 내가 곧 나가겠네.”

아버지는 차장군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다.
사랑방엔 서화와 차장군, 윤재도령 셋만 남았다.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 그 자리가 점점 숨 막혀올 즈음,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이고 차장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하하”


“아닙니다. 대감, 손님은 잘 맞이하셨소이까?”


“예, 장군 덕분에 잘 모셨습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오랜 벗답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화는 더 이상 앉아 있기 어려웠다.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저… 아버지, 소녀는 이만 물러가 봐도 되겠사옵니까?”


“서화 네가 퍽 재미가 없나 보구나?”


“네? 아… 그게 아니오라…”


“허허허, 늙은이 둘이서 주고받는 시답잖은 농에
어찌 아이들이 재미를 느끼겠습니까?
대감, 아이들은 보내고 우리 둘이서 이야기나 나눕시다.”


“예, 그리하십시다. 그래 서화야, 나가보거라.”

윤재 도령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서화는 조심스레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랑방을 나서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휴... 뭔 말씀들이 그리 많으신지 망부석 되는 줄 알았네…”

그러자 등 뒤에서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서화는 자신이 혼잣말한 것을 떠올렸다.

‘…아차차. 도련님께서 바로 뒤에 계셨지…’

황급히 돌아보려는 찰나,
윤재 도령이 먼저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개념치 마십시오.”


“송구하옵니다, 도련님. 뒤에 계신 줄 모르고 실언을 하였사옵니다.”

윤재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목례하더니 조용히 그녀를 지나쳐 갔다.

‘뭐야, 정말 차가우신 분이네… 뭐, 아무렴 어때.’

서화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서화가 자신의 방 앞에 도착했을 무렵,
마침 어머니와 마주쳤다.

“서화, 잠깐 따라 들어오너라.”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말투였다.
서화는 긴장된 마음으로 윤 씨 부인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서화야, 도대체 요즘 뭘 하고 다니는 게냐?”


“예? 무슨 말씀이신지…”


“어미가 모를 줄 알았더냐? 오전에도 약방에 다녀왔다지?”


“아, 어머니... 그건…”


“이 어미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네 아버지께서 아시면 경을 칠 일이다. 어쩌려 그러느냐?”

윤 씨 부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단호했다.
서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말처럼,
이 일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정말 집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송구하옵니다, 어머니. 하나 저는 꼭 찾아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그래, 네가 찾는 것이 연자근이더냐?”


“어... 어머니께서 어찌 그걸…”

서화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을 들은 윤 씨 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그 약초를 찾아 혜민서에라도 가려하였느냐?”

서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절대 안 될 일이다. 이 어미는 오늘 일, 못 들은 걸로 하마.
그러니 너도 연자근이니 뭐니 찾아다닐 생각은 꿈에도 말거라.
제발 좀 집에 얌전히 있으면서 바느질도 배우고,
글도 읽고 그래야 시집을 가지 않겠느냐.
이렇게 천방지축을…
아무리 네 아버지가 대제학이라 해도 어느 가문에서
널 받아준단 말이냐?”


“하오나, 어머니…”


“그만! 내 할 말은 다 하였느니 이만 나가보거라. 더 이상 듣기 싫다!”


“예, 어머니…”

윤 씨 부인의 방을 조심스레 나서며,
서화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왜 안 된다는 걸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왜 혜민서엔 얼씬도 못 하게 하시는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답답한 마음에 방으로 돌아와 앉았지만,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마음은 불안했고, 가슴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연심이는 도대체 어디를 간 걸까.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걸까…’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얼굴—복돌이.

‘연자근을 어서 찾아 복돌이에게 전해줘야 하는데…
분명히 구해주겠다고 약조했는데…’

복돌이에게는 어린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
아이들은 알 수 없는 피부병으로 밤잠을 설치고,
밥조차 삼키지 못한 채 고통을 겪고 있었다.
연자근은 피부의 독을 빼고 열을 내려주는 데
효과가 있다 들었다.
그래서 서화는 꼭 구해주겠다고 복돌이에게 약속했었다.
하지만 연자근이 있다던 만초방에서는
‘연’ 자조차 찾을 수 없었고,
결국 그 일로 어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지금 상황은 그야말로 얽히고설킨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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