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로부터 13년 전
“잊으면 안 돼요. 우리 혹 다음 세상이 있다면…
다시 만나기로 해요. 꼭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지막 기도가 되었다.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온몸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처럼,
숨은 목에 걸리고, 생각은 희미해진다.
그러다— 모든 소리가 멎었다.
세상도, 그녀도,
나 자신조차도 사라지는 듯한 고요 속에서 딱 하나,
그녀의 마지막 울먹임이 귓가에 스며든다.
“나는 꼭 기억할 거예요. 당신은 잊어도 돼요.
내가 기억할게요…”
그리고 그는, 그녀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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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로부터 13년 전.
잊지 못할 약속이 생의 마지막을 덮었던 그 순간에서,
시간은 조용히 거슬러 오른다.
"생선 사시오~
아따 오늘 생선 물이 아주 기가 막히당께요~
생선 사시오 생선을 사~"
"이리 오세요! 이 떡 좀 먹어봐요~
아휴 따끈따끈한 게 오늘 갓 쪄서 가져왔구먼~
이리 오시라니까요~?!"
시장통 한복판이 어찌나 시끄러운지,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였다.
그 복작한 소리 속을 단정한 걸음으로
지나가는 소녀가 있었다.
곱게 땋은 머리 끝에 빨간 댕기끈이 묶여 있고,
흰색 저고리와 연분홍 치마 자락이
시장의 먼지 위로 가볍게 흩날린다.
그녀의 이름은 김서화.
대제학 김지헌의 무남독녀이다.
조용한 성정과는 달리,
오늘 서화의 걸음에는 숨겨진 급함이 서려 있었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눈동자는 이곳저곳을 맴돌 뿐,
좀처럼 한 곳에 머물지 못했다.
그러다 이윽고— 시장 구석,
다소 허름한 목재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바랜 먹글씨로 ‘晩草房’ 만초방이라 적힌,
조그마한 약방.
"어후 겨우 찾았네...
연심이가 말한 곳이 여기 맞는 것 같은데..."
조심스레 문에 가려진 천막을 걷어내고
얼굴을 빼꼼 들이민다.
"흠흠, 누구요? 사람을 찾아오셨소~ 약을 찾아오셨소?"
뒤에서 묻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긴 흰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 마른 체형, 약간 굽은 등.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과 앙 다문 입술에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 저는 여기 만초방 어르신을 뵈러 왔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몇 차례 헛기침을 하시더니
아무 말 없이 약방 안으로 들어가셨다.
"나요. 내가 만초방 주인일세."
그 말과 함께 약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화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 적막한 분위기에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저... 어르신, 연심이 소개로 왔습니다.
여기 오면 제가 찾는 약초가 있다고 해서요..."
그 순간, 약방 할아버지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후’ 하고 내쉬면서 말했다.
“연심이? 고년이 하도 졸라대길래
내가 한번 구해보겠다고는 했지.
여기 있다고는 하지 않았네!
아직 못 구했으니 이만 돌아가게.
찾게 되면 내 연심이 한 테 말해둠세.”
그는 끝까지 서화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약초를 썰었다.
약방 안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칼이 약초를 가르는 칙칙한 소리만이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서화는 조심스레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아쉬운 발길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하다.. 연심이가 나한테 거짓을 말했을 리 없는데..
분명 여기에 오면 연자근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을 떠올리자,
연심이의 요란했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아씨~~!! 아씨~~!!!"
"아이참, 연심아!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아휴~ 아씨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래 두요오~!! 그게 있데요 그게!!"
"그거?? 그게 뭔데???"
"헉헉... 왜, 그거 있잖아유~~ 헉헉.. 연 뭐시기 그거어어~"
"혹시..연자근을 말하는거니?!"
"이이 맞아유!! 연자근!! 요 시장골목에 '만초방'이라고 조막만 한 약초방이 있는디, 거기 있다더라구유~~ 제가 월매나 찾아 달라고 졸랐는지 몰러유~~!! "
"그래?! 고마워 연심아!!"
"아씨이!! 같이 가야쥬우~~!!"
"아니 아니 연심이 넌 여기 있어 혹여라도 아버지가 날 찾으시면 뭐라도 둘러 대야 할 것 아니냐 응??"
"아, 알겠슈! 조심히 다녀오셔유~!"
그렇게 찾아간 만초방.
끝내 연자근을 찾지 못했다.
멍하니 얼마나 걸었을까?
우렁찬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키시오~! 길을 비키시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소리, 다그닥, 다그닥…
금세, 흙먼지가 자욱이 일더니 집채만 한 말들이
길목을 가르며 앞다투어 달려왔다.
잠시, 세상이 멈춘 듯했다.
'오늘 변방에서 장군님이 올라오신다더니 저분인가? 아버지께서 벗이 오신다고 밤잠까지 설치셨는데...'
하늘 높이 솟은 말 위,
햇빛이 비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말은 순식간에 서화 앞을 스쳐 지나갔고,
서화는 그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멀어져 가는 말의 꽁무니만 바라보았다.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서 집에 가 연심이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봐야겠다.'
서화는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향했다.
“연심아~ 연심아~”
아무리 불러도 연심이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서화가 애타게 부르고 있으니,
연심이의 어미 춘매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툭툭 닦으며 서화의 앞으로 다가왔다.
춘매는 서화의 유모이자, 연심이의 친어미였다.
“아씨, 연심이는 또 어째 찾으신데유~?”
“어멈, 마침 잘 왔어. 혹시 연심이 못 봤어?
내가 꼭 물어볼 게 있는데…”
“요년이 또 어딜 싸돌아 댕기는지,
쇤네도 오전 내내 그림자도 못 봤다니께유.
설마.. 아씨께 뭐 잘못한 거라도 있는 거 여유?”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아냐.”
“아씨, 요새 뭘 하고 다니시는지 쇤네가 여쭙지는 않겠지만… 조심하셔유.
혹여 대감마님 성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마시구유. 예?”
“아휴~ 알았어. 이따가 연심이 보게 되면,
내가 찾았다고 꼭 좀 전해줘. 알았지?”
서화는 그렇게 춘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사랑채로 향했다. 혹시 아버지께서 본인을 찾으셨을까 싶어,
늦기 전에 얼굴이라도 뵈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랑채에 다다르자 섬돌 아래 낯선 신짝들이 놓여 있었다. 이윽고 이야기 소리와 함께 호탕한 웃음이 안채에서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지? 누가 오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