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워지는 어둠
집 앞에 다다랐을 무렵, 하늘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지붕선 위로 바람이 스치고,
기와 끝자락에는 붉은빛이 길게 흘러내렸다.
서화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함께 걷던 윤재도 조용히 발을 멈췄다.
“… 도련님 예까지 오시지 않으셔도 되었을 텐데요..”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윤재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길은… 제가 잘 압니다.”
그 말에 서화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은 더 없었지만,
함께 걷는 내내 감돌던 공기가,
그 순간 더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오늘 하루…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윤재가 담담히 말하고,
서화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도련님께서야 말로, 저 때문에 노고가 많으셨지요.
…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윤재는 다시 고개를 숙였고,
서화는 그제야 조용히 대문을 열었다.
저택 안 마당ㅡ
익숙한 돌길과 나무 기둥들,
그리고 연등 하나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발걸음을 들여놓자,
부엌 쪽에서 희미한 된장국 냄새가 풍겨왔다.
조용히,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왔지만
서화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복돌이네 움막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안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 크지 않은 발소리가 돌길 위에 차분히 흘러나갔다.
그때—
“아씨!”
익숙한 목소리에 서화가 돌아보았다.
연심이었다.
숨이 조금 가쁜 얼굴로,
안채 쪽에서 서둘러 달려온 듯했다.
“이제야 오시면 어쩐데유?!… 마님께서 얼매나 찾으셨는데
석반 시간 다 되어 가유~!”
“그래? 얼른 옷 갈아입고 뵈러 가야겠구나.”
서화는 짧게 웃으며 말했고,
연심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곁을 지켰다.
그녀는 아직도 긴장이 덜 풀린 얼굴이었다.
잠시 뒤, 서화는 작은방에 들어와 단정히 앉았다.
연심도 익숙한 듯 방 안으로 따라 들어와
그녀 맞은편에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연심아.”
“예, 아씨.”
“나 오늘… 월촌에 다녀왔어.”
연심의 손이 무릎 위에서 살짝 멈췄다.
표정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 월촌 말씀 이셔유?”
“응. 복돌이네 움막에 직접 가봤어.
며칠째 아이들이 마을에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서화는 말끝을 가만히 눌렀다.
“아이들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돼서…”
연심은 서화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없더라.”
“………”
“집이 무너진 것도 아니었어.
정리된 채로…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어.”
서화는 그때 느꼈던 묘한 위화감을 다시 떠올리듯 말을 이어갔다.
“누가 일부러 자리를 치운 것 같았어.
짐도 그대로 있고, 수건도 곱게 접혀 있었고…
장작도 아직 쓰다 만 채로 남아 있었어.”
“………”
“복돌이가… 아이들 데리고 자리를 옮긴 걸까?
그 나이에 혼자서 그런 걸 할 수 있었을까…?”
서화의 말은 자문처럼 흘렀다.
연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연심아.”
서화가 조용히 연심을 바라보았다.
“혹시… 너, 아는 거 있어?”
연심은 그 순간, 눈을 질끈 감을 뻔했다.
숨이 목구멍에서 걸려 나올 뻔했지만,
꾹 삼켰다.
“… 지는 아는 게 없는데유..”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 말할 수도 없었다.
서화는 연심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작게 고개를 저었다.
“… 미안, 괜한 말을 했구나.”
연심은 그 말에 눈을 들었다.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 미소가… 연심의 가슴을 더 조이게 했다.
연심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흠흠 어휴 우리 아씨 시장 하시것네~ 석반 준비
어찌 되어 가는지 보고 올게유~ 잠시 쉬고 계셔유!”
그렇게 말한 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연심은 문밖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연심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등 뒤로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복도 끝까지 조심스레 걷다가
누가 보지 않는 쪽마루 뒤편에 다다랐을 때,
연심은 마침내 멈춰 섰다.
그곳에서, 조용히 몸을 구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 아씨는 암것도 모르시는 고만...'
작은 한숨이 입가를 맴돌았다.
복돌이네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화가 말하던 그 표정과 목소리.
그것들이 너무나 진심이었기에,
연심은 더더욱 가슴이 조여왔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며칠 전, 춘매가 연심을 따로 불렀다.
그날 밤,
아무도 없는 부엌 쪽에서.
“연심이 너… 복돌이 그 아이들, 안다고 했지?”
“알쥬..근디 엄니 왜 그런데유…?”
“아씨가, 그 아이들에게 너무 맴을 쓰고 계시는 고만”
“엄니 왜유? 그 아이들 아픈 아이들 이여유...
아씨께서도 그걸 아시니께…”
춘매는 연심의 말을 끊었다.
“대감마님도, 이 일을 다 알고 계시는 거 같단 말여..
그러니 연심이 니는, 그저 그 아이들을 조용히 옮기기만 혀라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알겠는겨?”
“엄니… 대감마님도 알고 계신다니.
고것이… 대체 뭔 말이데유…?”
“너야말로 잘 알지 않어?
아씨께서 무엇을 위해 그런 약초까지 찾고 다녔는지 말여.
허지만… 이 일은 아가씨께 알려선 절대 안되는겨.
이 엄니말 잘 알겠제?”
연심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다짐해 온 그 마음 하나로
그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연심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꼭 쥐었다.
춘매의 말이 맞는 건지,
자신이 정말 아가씨를 위해 옳은 일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화 아씨는 진심으로 아이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진심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죄송 혀유, 아씨…”
연심은 그 말을 입 안으로만 삼켰다.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 시각, 사랑채 안쪽.
윤 씨 부인은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한 권의 오래된 의서가 반쯤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 등잔불이 은은하게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마님.”
옥련이 조용히 들어서며, 차를 올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윤 씨 부인은 여전히 책상 앞에 앉은 채,
책장을 넘기다 말았다.
“……무슨 일인가.”
“요즘… 아씨께서 복돌이 일에 마음을 많이 두고 계십니다.”
윤 씨 부인은 손을 멈췄다.
등잔불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 애는… 정이 많지.”
옥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정이… 언젠가 화를 입을까 하여…
걱정이 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윤 씨 부인은 책 위에 시선을 둔 채,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 애는 아직… 몰라야 해.
그 약초가 왜, 감춰져야 했는지를.”
“………”
“그 시절… 단 한 번의 허락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지.”
“… 예, 마님.”
“그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그 일에 다시, 누구도 손대선 안 된다.”
옥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윤 씨 부인은 다시 찻잔을 들었지만,
차를 입에 대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향기를 음미하듯,
작은 숨을 내쉴 뿐이었다.
책상 위에 덮인 의서와
흔들리는 등잔불,
그리고 말없는 두 사람 사이의 정적 속에
언젠가 잊힌 이름들과 사건들이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피어오르던 의심과 두려움은,
그날 밤 사랑채의 등잔불 아래에서
조용히 진실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윤 씨 부인은 손끝에 닿는 종이의 감촉을 느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차마 넘기지 못한 생각들이 마음속을 맴돌았다.
서화가 알지 못하길 바랐던 진실들.
그러나 그 염원마저 점점 희미해지는 듯했다.
사랑채의 등불이 은은하게 흔들리고 있을 무렵,
윤 씨 부인은 서재에 홀로 앉아 오래된
의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끼익ㅡ
그때, 조용히 문이 열렸다.
“정희야.”
익숙하면서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윤 씨 부인은 살짝 놀라 말했다.
“……혹 홍충현 어르신 아니십니까?!”
어쩌면 모든 것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채, 아주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