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늦은 밤, 안채 큰방.
촛불 하나가 조용히 깜빡였다.
윤 씨 부인은 오래된 의서 한 권을 손에 쥔 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밖에서 옥련의 아뢰는 소리가 조심스레 들렸다.
"마님, 춘매 들었사옵니다."
윤 씨 부인은 본인도 모를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래, 들이거라"
춘매가 들어섰다.
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고개를 숙였다.
“마님, 부르셨어유...”
윤 씨 부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탁자 위에 놓인 의서를 손끝으로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길 뿐이었다.
“… 연심이, 그 아이가 요 며칠 이상하더군”
조용한 목소리.
감정이 실리지 않았지만,
무엇을 묻고 있는지는 분명했다.
춘매는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어휴 고년이 걱정이 많아진 모양이 여유..
요즘 아씨께서 힘들어 하시니께
지도 마음이 힘든 모양이네유...”
“걱정이라...”
윤 씨 부인은 그제야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가만히 손을 모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춘매야"
윤 씨 부인은 눈을 내리 깔고 의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어 물었다.
"그 아이들, 지금 어디 있느냐.”
춘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침묵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 피한 것뿐이여유..
마님께서 보시지 않도록,
아씨께 닿지 않도록.”
윤 씨 부인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서화는… 모르게 해야 한다.”
“쇈네도… 그리하길 바라고 있고만유...”
정적이 흘렀다.
촛불이 한 차례 흔들리고,
바람소리 하나가 종이문 틈을 스쳤다.
“헌데… 그 아이들을 숨긴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게 아니냐.”
그 말에 춘매가 아주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잠시 망설임.
그러고는, 침착한 음성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 마님, 이미 대감마님께서도, 이 일을 다 알고 계시는 고만유...”
윤 씨 부인의 많이 놀란 듯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 뭐라? 춘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야?
대감께서도 알고 계신다니?”
그렇게 침착했던 윤 씨 부인의 목소리가 커지고
표정은 심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정적.
윤 씨 부인은 책을 넘기지도, 말을 잇지도 않았다.
한참 후, 그녀는 마침내 놀란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춘매를 바라보았다.
“그래... 나에게 숨길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그 일을... 말해주는 게냐?"
춘매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씨께서.. 그리고 마님께서 화를 입으실까 겁이 나는고만유.. 마님,
마님께서 저희 모녀에게 베푸신 마음 잘 알고 있는디 쇈내가 어찌 모른척 하겠어유...
그래서... 지가 먼저 움직인 것 이여유...”
더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윤 씨 부인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고,
춘매는 고요히 일어나 조용히 문밖으로 사라졌다.
남은 건 촛불 하나.
그 작은 불빛이 잔잔히 흔들리는 방 안에,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들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감정은,
다른 곳에서도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며칠 전, 해가 기울던 저녁 무렵.
윤재는 월촌과 인접한 시냇가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들은 이야기 하나.
‘근처 산중에서 약초를 캐는 아이들을 봤다’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혼자 말을 타고 왔다 갔다 하다, 결국 말에서 내렸다.
걸어야 할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야.”
낯익은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두철이 팔짱을 낀 채 언덕 아래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 정신을 어디에 팔고 다니는 거냐?
며칠째 혼자 수련에도 자꾸 빠지고 말이야.”
윤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웃었다.
“숙부께선… 어찌 여기까지…”
“네가 그럴 녀석이 아닌데
며칠 전부터 자꾸 수련에도 빠지고
어딘가 나사 하나 풀린 놈 마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내가 어떻게 모른 척하냐?
아무튼 수상한 녀석.”
두철은 슬슬 언덕을 올라와 윤재 곁에 섰다.
그는 풀숲을 한번 훑어보더니, 팔짱을 푼 채 묻는다.
“무슨 일인데 그러냐.
요즘 너한테서 숨어 다니는 족제비 냄새가 나거든.”
윤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숙부, 제가 아는 아이가 있습니다.
복돌이라는 이름인데, 열 살쯤 된 아이.
쌍둥이 동생들도 있고요.”
“쌍둥이?”
“예. 피부에 뭔가… 병이 있습니다.
헌데 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졌고,
그걸 걱정하는 이가 있어…
그냥, 신경이 쓰였습니다.”
두철은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리더니,
바닥에 쭈그려 앉아 나뭇가지를 툭툭 쳤다.
“피부병 있는 아이들?”
“예. 좀 특이한 증상이었고…
약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철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허허… 피부병이라.
그거 참, 묘하게 들리는구나.”
윤재가 두철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냐, 아냐. 그냥…
문득 옛날 궐에서 있었던 일 하나가 떠올라서.”
“궐에서요?”
“그래. 오래전 세자 저하 말이다.
어린 나이에 피부병이 나셨는데…
그 병 때문에 조심하느라 약을 구해다 썼대지.”
두철은 나뭇가지를 입에 물며 말했다.
“그 약이 뭐였는지는 몰라도,
결국 세자 저하는 그 병 앓다 돌아가셨고.”
윤재의 표정이 굳었다.
“… 약이 잘못된 겁니까?”
“아마 그랬다지? 당시 떠돌던 소문에는
그 약을 처방한 어의는 쫓겨나고,
그 약을 구해온 자는 죽었단 말이 있었어.
그 뒤론 아무도 그 약 이름을 입에 안 올리더군.”
두철은 시치미를 떼듯 웃으며 일어섰다.
“피부병 하나가 여러 사람을 죽이기도 해.
살벌하지?”
“그… 약 이름이 뭡니까.”
“나도 몰라.
높은 곳에서 입 싹 닫았다니까?”
두철은 가볍게 윤재의 어깨를 툭 치고 내려갔다.
“넌 그냥 훈련이나 신경 써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윤재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말들이 퍼즐 조각처럼 머릿속에서 이어지기 시작했다.
복돌이 남매. 피부병. 사라진 아이들. 연자근을 찾았던 서화.
그리고… 세자.
그 순간,
머릿속에 한기가 스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감각.
이건 단순한 민가의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날 밤, 윤재는 조용히 서화를 찾아갔다.
사랑채 앞.
늦은 오후, 서화는 사랑채 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곁에 말없이 다가온 그림자 하나.
“서화 낭자.”
서화가 고개를 들었다.
윤재였다.
조용한 눈빛, 이전보다 어딘가 어두워진 표정.
“도련님… 여기엔 어인 일이시옵니까?”
윤재는 주춤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서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마당 끝 조용한 담장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윤재는 말을 아꼈다.
서화 역시 그 침묵을 깨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복돌이라는 아이…
그 동생들도… 근방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화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찾으신 겁니까?”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화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손을 움켜쥐었다.
“그럼…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아닙니다.
정확한 행방은 아직…”
윤재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허나… 낭자.
이제… 그 아이들 일은 접으심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서화의 표정이 무너졌다.
입술이 덜덜 떨리고,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예? 도련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왜 그런 말씀을...”
서화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땐,
목소리에 분명한 떨림이 실려 있었다.
“... 실망이옵니다.”
윤재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련님께... 조금의 기대를 품었나 보옵니다.
월촌까지 함께 가주시고,
복돌이네 움막에도 동행해 주셨던 분이라...
다들 그만하라고 해도, 도련님만큼은
제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주시리라 믿었사온데...
그건 결국, 소녀의 착각이었나 봅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련님마저… 제게 그만두라 하시옵니까?”
윤재의 손이 작게 움찔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런 변명도, 이유도 꺼내지 못했다.
“… 그럴 바엔,
차라리 처음부터 나서지 말아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서화의 눈엔 눈물이 맺혔지만, 고개를 들었다.
“다시는…
이런 일로 도련님과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사옵니다.”
그 말 한마디로,
윤재는 완전히 입을 닫았다.
말없이 고개를 떨군 채,
그녀가 등을 돌려 사라질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화를 낸 걸까.
아니면… 상처를 받은 걸까.
윤재는 문득, 서화의 떨리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뭐라도 변명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감히, 그녀 앞에서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녀는 윤재가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는 듯 등을 돌렸고,
그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을 탓한 채,
조용히 그 자리에 남았다.
“… 서화 낭자.”
작게, 혼잣말처럼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윤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어느새
별이 반짝이고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