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닿지 않은 곳
늦은 밤, 안채.
윤 씨 부인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천 위에 수를 놓는 손끝은 단정했지만,
실은 자꾸만 엉켜 들었다.
실을 풀려다 말고 손을 멈춘 그녀는,
고요히 실매듭을 내려다보다
작게 중얼였다.
“… 그날도… 이런 밤이었지.”
말과 함께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기억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16년 전, 서화가 태어나기 전의 조선의 궐
세자의 병세가 악화되던 어느 날 밤.
궁의 어의였던 홍충현은 조심스레 왕 앞에 엎드려 있었다.
“정녕, 방법이 없겠느냐.”
왕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절박했다.
홍충현은 잠시 머뭇이다 입을 열었다.
“전하, 한 가지 방도가 없진 않사오나…
그 효능만큼 부작용도 커, 쉽게 권해드릴 수 없사옵니다.”
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말해보라, 그것이 무엇이냐?”
“연자근이라 불리는 약초이옵니다.
예로부터 독기를 내려주는 효험이 전해져 왔으나,
사람에 따라 열독이 심하게 반응할 수 있어…
지금껏 쓰인 예는 드무옵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내 왕은 단호히 말했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할 때다.
세자를 살릴 수만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
며칠 뒤,
홍충현은 좌의정 윤현조를 은밀히 찾아갔다.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으며 홍충현이 말했다.
“이번 일은 자네의 도움이 절실하네.”
윤현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마땅히 따를 일이지.”
그러나 이내 눈빛을 고쳐 앉고 묻는다.
“허나… 만일 그 약으로 일이 그르친다면—
세자저하께서 위험에 처하신다면, 자네는 어찌하겠는가?”
홍충현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식어가는 찻잔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숨처럼 말이 흘렀다.
“… 내 손으로 탕약을 달일 것이네.
그리하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책임은, 나 혼자 짊어지겠네.”
윤현조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주 짧게, 그러나 깊게 웃었다.
“허허… 자네답지 않군.
우리가 몇 해를 함께했는데, 말 한마디가 이리 어려운가.”
홍충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순간, 윤현조가 고요히 한마디를 더했다.
“좋네.
우리, 한 번 해보세.”
그는 외교 루트를 통해
청국에서 연자근을 공수해 오겠다고 약조를 하였다.
직접 조달한 약재는 조심스레 궐로 들어갔고,
홍충현은 그 약을 탕약으로 달여
세자에게 올렸다.
그리고…
세자는 며칠 후 숨을 거두었다.
조정은 충격에 빠졌다.
“세자저하를 죽게 한 홍충현을 엄벌하라!”
“연자근을 들여온 좌의정 역시 공범이다!”
반대파 대신들이 분노에 찬 상소를 쏟아냈다.
왕의 총애를 받아온 홍충현과 윤현조—
그들을 끌어내려야 비로소 자신들의 길이 열린다고 믿은 자들.
왕은 침묵했다.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직접 명했기에...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윤현조는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식 기록엔 지병이라 명시됐지만,
그 시기와 정황은 너무도 절묘했다.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고,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윤현조의 죽음은 조용히 묻혔다.
윤 씨 부인 정희는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평소에 지병이 있으셨던가?
그렇게 쉽게 쓰러지실 분이 아니다…’
그녀는 진실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서재에 남아 있던 아버지의 기록을 뒤지고,
궁에 드나들던 이들의 동선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 일을 함께 했고
평소 아버지께서 벗이라 부르시던
홍충현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외진 산골, 늦가을 연한 안개가 감도는 약초밭 언저리.
외딴 오두막 앞에,
그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정희가 아니더냐...?”
그녀는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어르신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신 걸 아시는지요…?"
홍충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나 이 소녀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도 저희 아버지가 병사라
생각하고 계시옵니까?”
한참을 말없이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그래, 정희야 윤현조 그 친구는,
나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다.
내 손으로 탕약을 달였고,
내 손으로 세자 저하께 올린 것이다.”
정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르신 그 약초가 대체 무엇이옵니까..?
대체 무엇이기에 책임의 형벌이 이리 무겁단
말씀입니까..?”
“… 책임이 문제가 아니다.
세자 저하께서 돌아가셨다.
우리 모두가 감내해야 할 부분인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이 일은… 다시는 꺼내지 말거라.
너의 아버지의 일도 더 이상은 캐고 다니지 말거라
알겠느냐?”
그 말과 함께, 그는 다시 조용히 돌아앉았다.
그날이, 둘의 마지막이었다.
윤 씨 부인은 과거를 회상하며
엉킨 실을 천천히 잘라냈다.
그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아무 소리 없이 굴러갔다.
“… 서화야.”
그녀는 작게 속삭였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 이름은… 다시 입에 올려져선 안 되는 것이다.
너만은… 그날의 그림자에 닿아선 안 돼…”
등불이 흔들렸다.
방 안엔 다시 조용한 밤이 내려앉았다.
그날의 비밀은, 그렇게 묻혔다.
그리고 지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시각, 병영 밖 숲 언저리.
윤재는 거친 숨을 내쉬며 산자락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인근 움막들을 수소문했지만,
복돌이 남매에 대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마치 놓쳐선 안 될 실마리를 등 뒤에 두고 온 듯한 감각.
그때— 문득 두철의 말이 떠올랐다.
“그 약을 쓴 뒤로 세자가 죽었다더라…
이름이 뭐였더라… 연자근?
뿌리가 연꽃처럼 생겼다던데…”
처음 듣는 약초의 이름이었다.
허무맹랑한 뒷소문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불편하게 조여왔다.
윤재는 허리춤의 물병을 꺼내어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나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복돌이라는 아이, 그리고 그 동생들…
서화 낭자께서… 챙기셨다고 했지.’
그녀는 그저 마음이 쓰여 도왔을 뿐이라 말했지만,
그날, 조용히 말을 맺고 돌아서던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자신만의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듯했다.
무엇을 감추는 것이라기보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이 있는 것처럼…
그는 풀숲 사이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낮게 드리운 나뭇가지가 어깨를 스치고,
이따금 들어오는 바람이 등을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낭자가 위험해지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끝엔, 자신도, 그녀도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
“… 내가 먼저 찾아야 한다.”
혼잣말처럼 내뱉은 목소리는
결심처럼 묵직하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윤재는 말없이 칼자루를 쥐고,
더 깊은 숲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딱.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지는 소리에,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폈지만,
움직이는 건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잎뿐.
얼마간의 침묵 끝에,
그는 조용히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 이래서 낭자가 혼자 다닌다 했을 때부터 불안했던 거다…”
서화.
처음엔 단지, 궁금했다.
천민의 아이들을 찾아 나서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 단단하고,
또… 너무 아파 보였다.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윤재는 문득, 자신이 왜 이 깊은 산속까지
혼자 걸어 들어왔는지 깨달았다.
복돌이와 그 동생들을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단 하나.
서화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하나였다.
“… 참, 미련하군.”
스스로를 향한 쓴웃음이 입가에 맺혔다.
그러나 이내 그 웃음은 아주 작게 번져갔다.
그 순간—
다시금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어쩐지, 바람 속에
누군가의 숨결이 섞여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윤재는 멈춰 섰다.
숲 너머, 아직 닿지 않은 어딘가에—
그가 가야 할 곳이, 분명히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