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은 순리대로
그날 밤, 서화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달빛이 담장 너머로 떨어지고,
마당 끝 작은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내가 직접 물을 수밖에.’
혼자 찾아갈 곳은 단 하나였다.
시장 어귀의 허름한 약방.
만초방(晩草房)
서화는 걸음을 재촉했다.
밤공기는 서늘했지만,
가슴속은 더 뜨겁게 요동쳤다.
문을 열자 익숙한 쑥 냄새와
묵은 장서 향이 섞여 퍼졌다.
백서는 구석에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약재를 다듬던 손이 멈췄다.
“… 그래, 한 번은 올 줄 알았네.”
서화는 숨을 골랐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어르신.
그 약초… 연자근에 대해 알고 계시지요?”
백서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서화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안엔 단단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어머니께서도 찾지 말라 하시고,
그 아이들까지도… 혹시 그 일과 관련이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백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정희야… 어쩌면 좋단 말이냐.
흐름이 움직이고 있다고는 했지만,
서화가 이렇게 일찍 날 찾아올 줄은…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 아이도, 사실을 알아야 멈추겠지.’
곧이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서화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말할 수밖에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연자근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독초네.”
서화는 숨이 턱 막혔다.
“… 죽일 수도… 있다고요?”
백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에서 그 약초를 알고 있는 이는 손에 꼽을 걸세.
본디 청나라에서 들어온 귀한 약이었지.
오장에 깊이 들어가 독기를 없앤다는 말도 있었고,
반대로 체질에 따라선…
장기를 타들어가게도 한다 했지.”
서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는 숨이 잠깐 목에 걸렸다.
“… 제가 찾으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 아이들을 데려간 거라면…”
백서는 짧은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모른다.
허나 연자근을 찾는다는 자가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표적이 될 수 있지.”
서화는 혹 본인의 행동으로 인하여
아무 잘못 없는 아이들이 다칠까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 정말… 그 약초 때문에
누군가를 잃은 일이 있었습니까?”
백서는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둠 속에서 오래 묵은 서책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서화는 탁자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백서가 내놓은
서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점점 서화의 숨이 거칠어지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백서가
나지막이 말을 이어갔다.
“왕세자께 썼다.
그리고… 세자는 죽었다.”
그의 말에 서화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백서를 바라보았다. 서화의 눈빛은
떨리고 말이 새어 나왔다.
“… 그게… 연자근이었습니까?”
백서는 고개를 떨구며
마치 온 숨을 짜내듯 낮게 말했다.
“그랬네, 내가 부탁을 하였고
그 약을 구해온 건… 자네 어머니의 아비였지.”
서화는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그 일로… 나는 어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자네 외조부는… 죽었네.”
등잔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화는 탁자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손끝에 땀이 맺혔지만
차가운 건 손이 아니라 그가 던진 진실이었다.
이내 서화는 만초방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달빛이 내려앉은 골목을 숨 가쁘게 달려 나갔다.
생각도, 호흡도 따라오지 못했다.
무언가가, 지금 막 안에서 터져 나와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다.
발이 휘청거렸다.
땅이 흔들리는 듯했고,
바닥이 어디 있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잽싸게 그녀를 붙잡았다.
“……!”
서화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 익숙한 얼굴.
윤재였다.
그를 보는 순간,
놀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숨도, 말도 없이.
서화는 그의 품에 안겨서
작은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숨이 끊어질 듯, 참을 수 없이.
한참을 쏟아 냈다.
윤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고 있었다.
움직이지도, 묻지도 않았다.
서화는 윤재의 도포 자락을 움켜쥐었다.
손이 떨렸다.
입술이 부르르 떨면서
울음과 뒤섞인 말을 뱉어냈다.
“......... 이 모든 건 저 때문이옵니다.
괜한 저의 알량한 동정심이
그 아이들을 위험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상처까지 들춰낸 것 이옵니다..
다, 저 때문이옵니다."
떨어지는 말.
그리고 다시 터지는 울음.
윤재는 고개를 숙였다.
품 안의 서화가 한참을 울도록,
조용히 그대로 서 있었다.
등 뒤로 찬 바람이 스쳐갔지만,
팔 안의 온기는 더욱 또렷하게 전해졌다.
그는 서화의 어깨를 감싸며,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서화는 고개를 들었지만,
제대로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도련님, 도련님께서는 … 연자근이 뭔지 아시옵니까?”
윤재는 당황한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저 희귀한 약초라고만… 들었습니다.”
서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사람을 죽게도 한답니다.
세자저하께옵서… 그 약초를 드시고 돌아가셨답니다.
그리고 그 약초를 구해오신 분은… 제 외조부셨고…
그 약을 탕약으로 올린 분은…
만초방의 백서 어르신이었어요.”
말을 잇는 사이, 서화의 손이 점점 더 떨려왔다.
윤재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럼, 낭자께서 그 약초를 찾아다니신 것입니까?"
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복돌이라는 아이를 도와주겠다고…
그 약초를 찾으려 했습니다.
피부병을 앓고 있는 동생들이 있었사온데..
그 아이들을, 그저 살리고 싶었던 것뿐인데…
제가 그 아이들을 되려 위험하게 만들었사옵니다...”
윤재의 눈빛이 깊어졌다.
서화의 말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진실의
퍼즐을 맞추듯 머릿속에 들어왔다.
두철에게 들은 옛이야기가
이제야 이해되는 모든 게 하나로 이어졌다.
서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윤재는 조심스레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다 괜찮을 겁니다.”
그 말이 얼마나 힘없는 위로인지,
윤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말도,
이 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임을
그는 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서화가 조금 진정되자 윤재는 조용히 물었다.
“혼자 오신 겁니까? 이 야심한 시각에…”
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낭자께서 이렇게 혼자 거리를 다니시면…”
서화는 말없이 따랐다.
윤재는 그녀의 어깨 위에
자신의 도포를 살며시 걸쳐주었다.
그 옷자락 사이로 아직 식지 않은 울음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시장 골목을 빠져나왔다.
달빛은 그들의 뒤를 따르고, 바람은 사라진 듯 고요했다.
걷는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되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담장 앞에 도착했다.
서화는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 이제, 괜찮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들어갈 수 있사옵니다.”
윤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 내일 다시 뵈어도 되겠습니까?”
서화는 그 말에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예..”
그리고 서화는 담장 안으로 사라졌다.
윤재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날 밤, 바람은 불지 않았다.
그러나 윤재의 가슴속엔,
조용히 거대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그 시각 서화는 조용히 문 안으로 들어섰다.
발끝에 닿는 익숙한 마루가,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이내 눈을 감고,
윤재의 품에서 쏟아냈던 울음을 떠올렸다.
부끄러움도, 후회도 아니었다.
그저— 감당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스스로를 붙들 수 없었던 순간.
“그 약을 구해온 건… 자네 어머니의 아비였지.”
백서의 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서화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 눈가가 따가웠지만,
마음 한 켠엔
작은 의문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젠… 난 어찌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