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숨겨진 실타래

첫 끄트머리

by 붕어예요

그날 밤 이후, 서화는 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백서의 말이 떠올랐고,
윤재의 품에 기대어 흘린 눈물의 감촉이 다시금 살갗에 스몄다.
조용한 새벽녘.

서화는 이불을 조심히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의 방 앞에 이르러, 문틈 너머 스미는 희미한
등불을 바라보았다.

잠들지 못한 기척.
서화는 문을 열지 않았다.
그저 그 앞에 조용히 앉아, 등을 기댄 채 무릎을 감쌌다.

말없이,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 입술을 떼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어머니…
이젠 더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실을 알아야겠습니다.”

그 말 뒤, 서화는 천천히 일어섰다.
한 번도 닫히지 않았던 문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묵직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서화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백서가 건넨 오래된 서책을 꺼냈다.

책장을 넘기는 사각거림이 고요한 방 안을 가로질렀다.
이미 여러 번 읽은 대목이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 연자근(蓮子根): 청에서 유입된 희귀 약초로,
폐열을 내리고 정신을 안정시킴.
체내 열독(熱毒)을 풀어, 종기・진물・
피부 헌데를 삭이는 데 효험 있음.
그러나 체질에 따라 복용 시 어지럼・발열・
몸살기 유발 가능.
감초(甘草)・해홍초(海紅草)와 혼합 복용 시
구토・경련・혼절에 이르며,
심할 경우 사망 가능성 있음. 주의 요함.

서화는 손끝으로 글귀를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감초… 해홍초…”

책장을 넘기며 옛 의서들을 훑었다.
그 안에서도 연자근과 관련된 치명적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그마저도 대부분, 다른 약재와 혼합된 경우였다.

“… 단독 복용으로 인한 사망 보고는, 거의 없는데…”

시선이 멎고, 숨이 깊어졌다.
산산이 흩어졌던 이야기들이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아 맞춰지기 시작했다.

어의였던 백서.
약초를 구해온 외조부.
세자의 죽음.
너무나 빠르게 정리된 진상.
그리고… 지병이라던 외조부의 급작스러운 죽음.

“너무 급하게 마무리가 됐어…”

서화의 낮은 읊조림이 방 안을 울리는 듯 메아리쳤다.
이건 단순한 병사일까.
아니면, 침묵이 빚은 타살일까.
서화는 책을 덮고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고요한 방, 흔들림 없는 등잔불.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출렁이기 시작했다.

“진짜 독은… 약초가 아니라,
그 약을 둘러싼 거짓이었을지도 몰라.”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또렷했다.
창문 너머로는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이것은,

서화가 진실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
첫 번째 새벽이었다.
서화는 조용히 책을 정리한 뒤 일어섰다.
손끝에 닿은 표지는 오래된 가죽으로 덧대져 있었고,
세월을 견뎌낸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하지만 정말 낡은 것은 종이도, 서책도 아닌—
그 안에 담긴, 왜곡된 시간들이었다.
책장을 덮으며 서화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누군가… 처음부터 진실을 지워온 걸지도 몰라.”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서재… 그곳에 옛 기록들이 있었지.”

그 말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서화는 살며시 방문을 열고,
안채를 빠져나와 사랑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당은 아직 어둠이 잔잔했고,
대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움직여 서재 문 앞에 섰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마찰음이 길게 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종이 냄새와
나무 서가의 묵직한 향이 맞이했다.
서화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책 등 하나하나에 손을 얹으며 조심스럽게 살펴나갔다.

“약재 기록… 조정 상소문 정리록… 그리고…”

그러던 중, 그녀의 손이 어느 얇은 책에 멈췄다.
표지는 낡았지만, 여백 없이 단정히 적힌 글씨가 또렷했다.

>‘연례의안(年例議案) - 을축년 조정 회의록’

책장을 넘기자, 눈에 익은 이름들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세자저하 병환에 대한 회의록 일부 발췌’
>어의 홍충현 진찰 내용 기록’
>'좌의정 윤현조 관련 진술 정리록'

서화의 숨이 멎는 듯 멈춰 섰다.
다음 장을 넘기려는 손끝이 떨렸다.
그런데—
그다음 페이지는 없었다.
정확히는, 거칠게 뜯겨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가 너덜거렸고,
그 위엔 희미한 먹 자국만이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그녀는 숨을 삼키며 서가 속 책들을 더 뒤졌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기록들 속에서도,
연자근과 세자의 병세에 관련한 내용이
담겼을 법한 부분들만
하나같이 사라져 있었다.

“… 누가… 일부러 없앤 건가…”

그녀의 낮은 속삭임이 방 안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적막은 대답 대신,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러다 문득, 책상 서랍 앞에 멈춰 섰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이끌린 듯,
조심스레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낡은 비단 두루마리와 함께,
작고 얇은 종이 묶음 하나가 조심스레 끼워져 있었다.
글씨는 거의 바래 있었지만,
서화는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꺼내 펼쳤다.
맨 위, 또렷한 필체가 남아 있었다.

>위 보게나
사방이 고요하나,
그 고요함 아래로 짙은 기류가 흐르는 걸 보니
내게 닥쳐올 날도 머지않은 듯하네.


병이 든 것도 아니건만, 몸이 점차 식어가니
이건 수명이 아닌, 사람의 손이 미치려는 징조라 여겨지는구나.

이쯤에서 멈췄어야 했으나,
끝까지 진실을 좇고자 했던 내 어리석음이
어쩌면 내 아이에게, 그리고 자네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될까… 두렵기만 하네.

혹시라도 내가 갑작스레 세상을 뜨거든—
병사라 둘러대게.
그 어떤 의심도, 그 어떤 파문도 남겨선 아니될 것이야.

정희는… 모른 채 살아야 한다.

그 아이는 아비의 죽음에 진실을 품고 살아선 안 돼.

사위, 마지막으로 부탁하네.
정희를…
부디, 우리 정희만은 지켜주게.

내 피붙이 하나 남기고,
나는 이만, 붓을 놓네.


서화는 그 글을 읽는 내내 손끝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숨을 내쉬는 것도 잊은 채,
글귀를 다시 읽고 또 읽었다.

“… 어머니께선… 또 소중한 이를
잃게 될까 두려우셨구나.”

서찰은 단 한 장이었지만,
그 안엔 오래 묻혀 있던 진실,
지켜지지 못한 사랑,
그리고 간절한 유언이 담겨 있었다.

서화는 서찰을 가슴께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그녀는 확신했다.
이건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같은 시각.

서화가 연화암을 향해 떠나던 새벽,
윤재는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아직은 해가 완전히 뜨기 전,
공기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더 차가웠다.

“그 약은… 정말 연자근이었던 걸까.”

처음엔 그저 병든 아이를 돕고자 하는
서화의 부탁에 마음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끝자락에, 세자의 죽음이 있었고—
만초방의 백서,
그리고 좌의정 윤현조의 이름까지 등장했을 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그 순간부터였다.
멈추지 않는 생각과,
지워지지 않는 단서들이
그를 이끌기 시작한 건.

“여기서부터는… 걸어야겠네.”

윤재는 말에서 내렸다.
앞에는 오래된 초가 한 채가 있었고,
기와는 반쯤 무너져 있었다.
문 앞에선 검은 개 한 마리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누웠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조용히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거친 기침소리가 들렸다.

“거… 뉘시오?”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눈두덩은 부어 있고,
옷자락은 흙투성이인 노인이 한쪽
문틈으로 윤재를 바라보았다.
그 눈엔 의심과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윤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혹시… 강성노 관리되십니까?
예전, 시약고에서 세자저하께 올리는 약재를
관리하셨던 분이라 들었습니다.”

그 순간, 노인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는 곧 문을 탁 하고 닫아버렸다.

“그 자는 이미 죽었소이다.
그러니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그 속엔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윤재는 문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조용히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꼭 여쭐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안에서는 침묵만이 흘렀다.
윤재는 문득, 결정적인 한마디를 꺼냈다.

“혹시… 연자근을 아십니까?”

그 말이 닿자마자,
안쪽에서 탁! 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잠시 뒤 문이 벌컥 열렸다.

“뉘… 뉘시오? 당신이 어찌 그것을…”

노인의 목소리는 떨렸고,
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놀람,
그리고 오래된 기억의 흔들림이 어렸다.
윤재는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꼭 알아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시는 것 이 있다면 말씀 좀
해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노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 속엔,
마치 오래 숨겨왔던 무언가를 꺼내려는
사람의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래, 강성노..자네가 찾는 이가 바로 날세.
여태 그 이야길 꺼내는 자가 없었는데..
이젠 다 잊힌 줄 알았 것만…”

그는 느릿하게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된 장롱 위에서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다 파기하라는 명이 내려왔지.
그래도… 손이 안 떨어지더군.
그날, 난 분명히 약재를 직접 확인했으니까.”

윤재는 조심스레 두루마리를 받았다.
묵은 먼지가 손끝에 남았다.
종이를 펼치자,
먹이 바랜 글씨가 몇 줄 적혀 있었다.

>‘해홍초 함유 확인됨.
혼합 가능성: 감초 소량.
연자근 향취 약함.
고온 증기 처리 후 변성 의심.’

윤재의 숨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이 기록, 사실입니까?”

강성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맞네.
그 약… 연자근 냄새가 너무 약했어.
난 그게 이상해서 윗사람에게 말했지.
그랬더니 며칠 뒤,
나는 궐 밖으로 쫓겨났네.
이름도, 기록도 다 지워졌다네.”


윤재는 고개를 숙였다.
종이 끝자락을 보니,
기록자 이름이 의도적으로 찢겨 있었다.


그는 종이를 다시 접고 천천히 마당을 나섰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지만,

윤재의 마음속엔 짙은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어쩌면 세자는… 독살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죽음을 누군가는… 덮었다.”

그 순간,

윤재의 머릿속에 서화의 얼굴이 스쳤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그 말이.

“세자저하께옵서…
그 약초를 드시고 돌아가셨답니다.”

그 말은 이제,
의심이 아니라 진실로 향하는 문 앞에 놓인 열쇠였다.
윤재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은 사라지고,
동녘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럼… 누가, 그 탕약에 마지막으로 손을 댄 거지?”

그날 새벽.
서화와 윤재는 서로 다른 길을 따라,
단 하나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매주 화,금 오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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