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그 이름 하나

아니겠지요?

by 붕어예요

연화암으로 향하던 새벽.
안개가 서린 산자락 길 위, 서화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숲 속은 아직 캄캄했고,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함 속에서, 그녀의 마음만 분주히 흔들렸다.

'혹여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면…
그럼 나는, 어찌해야 할까.'

서화는 꼭 쥔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 손 안에는 외조부의 손때가 묻은 작은 편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 글에 적힌 단서를 따라, 이른 새벽 발길을 재촉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연화암은 세월에 잠긴 고요한 암자였다.
담쟁이가 엉킨 담장, 마른 가지들이 스치는 소리만 바람 따라 흔들렸다.
서화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누구시오?”

허름한 승복을 입은 노승이 마루 위에 앉아 서화를 바라보았다.
낡은 염주와 묵은 담배 연기 냄새가
은은히 스며든 공기 속.
서화는 조심스레 허리를 숙였다.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제 외조부께서
이곳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윤현조 대감이십니다.”

노승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고요한 눈으로 서화를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조용히 말했다.

“… 저를 따라오시지요.”

스님은 마루 끝을 돌아 작은 선방으로
서화의 앞길을 이끌었다.
그의 걸음은 느렸지만 단호했고,
오래된 기억을 따라 걷는 듯했다.
선방 안엔 은은한 향 냄새와 함께
먼지 쌓인 책장이 놓여 있었다.

노승은 서랍을 열어 오래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서 조심스럽게 바랜 종이 한 장을 꺼내
서화에게 건넸다.

“오랜 세월, 간직해 온 것입니다.
윤 대감께서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나시며 남기셨지요.
혹 이 일로 다시 누군가 찾을지 모른다… 하시면서요.”

서화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 종이를 받았다.
먹물은 많이 흐릿해져 있었지만,
붓글씨 하나하나는 또렷했다.

> 경술년 8월. 흐림.

세자 저하께서 승하하신 후,
이 일과 관련하여 백방으로 살펴본 바,
그날 백서가 올린 탕약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그런데—
시약 고를 관리하던 강성노의 말에 따르면,
그날 백서 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시약고에 다녀갔다 한다.

그 자의 정체는 불분명했다.
명부에도 없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나는 이 사실을 김판윤에게 전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알 수 없는 서늘함이 온몸을 훑었다.

그는 수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약 없는 시간만이 흘렀다.

결국, 내가 그를 직접 찾아갔을 때—
다시 마주한 그의 눈빛 속에서
이번엔 분명히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반기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끝내 묻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나 또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안다.

이 일로 인해 또 누군가가 다치길 바라지 않는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나 하나로 충분하다.

허나, 세자 저하께서…
혹 나로 인해 승하하신 것이라면—
그 죄업이…
심히 통곡스럽다.

종이를 다 읽고 난 뒤에도, 서화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진실이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안개처럼 그녀의 가슴을 막고 있었다.

“… 외조부께선 끝내 그를 믿고 계셨던 걸까요?
아니면, 의심하셨던 걸까요?”

서화는 낮게 중얼였다.
노승은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윤 대감께선 말씀은 적으셨지만,
그분 을 벗이라 여기셨기에
아마 마지막까지 믿고 싶으셨을 겁니다.”


‘판윤… 외조부께서 그를 믿으셨다고?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단 말이야…?'


서화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 16년 전 판윤을 지내신 분을 아시옵니까?”

노승의 눈빛이 일순 흐려졌다.
고요히 시선을 거두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판윤이라… 아, 예. 기억합니다.”

“…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서화의 목소리에 조금의 떨림이 섞였다.
노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윤 대감께서 생전에 그분과 함께
이곳에 몇 차례 오신 적이 있었지만…
대감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으셨지요."


그 순간, 서화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이름 하나.
하지만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조용히 퍼지기 시작한 의심은
이내, 말없이 커다란 파문이 되었다.

서화는 두 손으로 종이를 꼭 쥐었다.
숨이 가쁘게 오르내렸지만, 고개를 들었다.

‘… 다음 갈 곳이 정해졌다.’

어쩌면 그녀가 찾아야 할 진실은,
가장 멀다고 믿었던 그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너무도 가까운 곳에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용한 산자락 아래, 안개가 서서히 걷히던 이른 아침.

서화는 연화암을 떠나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소매 끝을 스치고,
마음속에는 무거운 생각들이 맴돌았다.
외조부의 글이 남긴 울림은 아직도
그녀의 가슴 깊은 곳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
길 아래쪽,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익숙한 실루엣 하나.

갓을 쓴 채, 말없이 서 있는 청년.
짙은 자줏빛 도포 자락이 바람결에 살짝 흔들렸다.

“… 도련님?”

서화가 조심스레 불렀다.
윤재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고 담담한 눈빛 속에 걱정이 어렸다.

“서화 낭자, 이른 새벽인데…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서화는 잠시 망설이다,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 담긴 진실.
이제는 혼자 품고 있기엔 너무 벅찼다.

“… 연화암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제 외조부께서 생전에 드나드셨던 곳이었어요.”

윤재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외조부님이라 하시면...”

“전 좌의정 윤현조 대감이십니다.”

그 순간, 윤재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 윤현조… 그분 께서 낭자의 외조부님 이셨습니까?”

서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윤재는 그것을 받아 들고, 흐릿해진 먹글씨를 천천히 읽었다.
숨이 고요히 흐르고,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그분께서도, 이 일의 진실을 쫓고 계셨군요.”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밝히지 못하신 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서화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윤재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 나직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서화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말했다.

“이 기록 속의 사람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분이라면… 진실의 조각을 하나쯤은 더 쥐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윤재는 서화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흔들리면서도 굳은 결심을 머금은 얼굴.
그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안에서도 무언가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 같이 가시지요.
이 길, 혼자서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서화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늘 홀로 서 있으려 했던 그녀에게,
누군가가 처음으로 내민 손.

작은 침묵 끝에, 서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한발, 두발 발을 맞춰 천천히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서화였다.

"그런 도련님께서는 이 시간에 어딜 다녀오십니까?"

윤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 시약고에서 관리로 계셨던 분을
찾아뵙고 오는 길입니다."

서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얼굴을 숨길 수가 없었다.

"혹 뭐라도 알아내셨습니까?"

그러자 윤재의 미간이 살짝 찌푸러졌다.
그는 조금 답답한지 짧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예, 당시 탕약에 연자근만 들어간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듭니다."

둘은 그 뒤로 말이 없었다.
왜일까? 이 진실의 무게가 무겁다는 걸
알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얼마의 침묵이 지났을까 윤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서화 낭자 정녕 진실을 알고자 하십니까?
낭자께서 위험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서화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도련님 저는 꼭 알아야겠사옵니다.
그래야 저희 외조부님의 억울함도 풀고..
저희 어머님의 상처가 조금은 아물지 않겠사옵니까?
도련님께서는 이만 하시면 되었습니다.
소녀를 도와주려 하셨지요?
이 정도도 충분하옵니다. 혹 저로 인해 도련님께서
화를 입게 되실까 심히 염려되옵니다."

서화의 솔직한 고백에 윤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윤재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서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낭자, 저는 이미 발을 빼기 어려울 듯합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하는데 함께 하시지요.
제가 낭자를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그 무뚝뚝한 말 한마디에,
서화는 순간 숨이 멎은 듯 멈춰 섰다.
그리고 한참을, 조용히 윤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화는 잠시 말을 잃었다.
따스하면서도 묵직한 그 말이, 가슴 깊은 곳까지 울려왔다.
그동안 혼자 걸어왔다 믿었던 길.
하지만 지금, 그 곁에 누군가 함께 걷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쩐지 믿기지 않았다.

“… 감사합니다, 도련님.”

작게,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였다.
서화는 고개를 숙인 채, 손끝을 꼭 모았다.
두 사람 사이로 바람 한 줄기 스쳐 지나가고, 산 아래 어스름한 햇살이 어렴풋이 퍼져나갔다.

그리곤 다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외롭지 않은 발걸음으로—
진실을 향한 길 위에,
함께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드리워졌다.

그러나,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서화는 솔직히 조금 두렵기도 했다.

‘가장 믿고 싶은 이름.
그런데 지금, 가장 의심스러운 이름.
나는… 과연 그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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