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계절
겨울이 늘 지나가듯, 봄도 해마다 다시 찾아왔다.
윤재가 도성으로 내려가면 사랑채에는 집안이 맺어준
서화 또래의 부인이 앉아 있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이 있었다.
모두가 “가문의 등불”이라 떠받들었으나,
그 웃음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자개 문양 같아
차갑게 빛날 뿐이었다.
아이가 돌을 지나 첫말을 떼던 날,
장내는 환호로 가득했으나 윤재의 가슴은 묘하게 비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또한 내 책임이다.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쁨은 마음 깊은 곳까지 내려가지 못했다.
허나 산을 오르면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산속 집 마당,
돌멩이를 굴리며 깔깔대는 아이들,
화롯불 위로 번지는 따스한 숨결,
바느질을 멈추고 고개 들어 맞이하는 서화의 눈빛.
막동이는 늘 먼저 뛰어나와 외쳤다.
“도련님, 오늘도 오셨네요?!”
“그래, 이 녀석 또 계곡에 들어가 놀 작정이냐.”
“예. 어제 비가 오더니 오늘은 물이 제법 맑습니다.
저 아래 큰 바위까지 가볼 거여요!”
서화가 웃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윤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찌 아니 오겠습니까?”
그 말은 처음엔 망설이며 나왔고, 이내 습관처럼 되었다.
그리고 열 해 동안, 그 습관은 진솔한 맹세가 되었다.
봄이면 어린 손에 나무검을 쥐여주며 자세를 잡아주었고,
여름에는 시냇물에 발을 담근 채 물살의 소리를 들었다.
가을이면 밤송이를 까서 나누었고,
겨울이면 장작불 곁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막동이는 점점 장정이 되어 나무를 패고 지붕을 얹고 길을 냈다.
도성의 아들은 비단옷을 입고 글씨를 배웠으나,
막동이는 손바닥의 굳은살을 자랑스러워했다.
어느 날 서화가 물었다.
“명호, 그 아이는 어떠합니까? 아버지를 많이 닮았겠지요?”
윤재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예, 닮았습니다...”
그는 말을 아꼈다. 서화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잘 알지만...
명호보다 막동이가 내 아들 같을 때가 있습니다.”
막동이가 툭 내뱉었다.
“저도 그러합니다! 도련님께서 제 아버지 같으십니다!”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웃음은 나무벽을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 별 사이로 흩어졌다.
세월은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만큼 많은 일을 품은 말도 드물다.
그렇게 행복한 날도 어느덧 십여 년이란 시간을 지나왔다.
나라가 그 평온을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종각이 요란히 울렸고, 북방에서 전운이 일었다.
조정은 명문 무가의 장정들을 불러 모았다.
윤재 역시 피할 수 없는 부름을 받았다.
그날은 첫 매미 소리가 들린 날이었다.
서화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았다.
눈물 어린 목소리마저 떨렸다.
“정녕 가셔야 하옵니까?”
그런 서화의 두 손을 살며시 잡으며
윤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를 두고 가려니 나 역시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살아서 낭자 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 막동이가 나섰다.
“도련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서화가 막동이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막동아, 아니 될 말이다.”
막동이가 비장한 눈빛으로 말을 하다가
이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아씨, 걱정 마셔요. 이제 제 나이도 어느덧 열여덟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도련님께 열심히 검술 훈련을 받았으니
가서 도련님 심부름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윤재가 낮게 말했다.
“막동아, 정녕 괜찮겠느냐?”
막동이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갔다.
“당연하지요! 도련님께서 옆에 계시지 않습니까?
절대 도련님께 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서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막동이가
서화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아씨, 그동안 아씨께 또 도련님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같이 천한 것을 거둬주신 그 은혜를 보답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이렇게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게 해주셔요.
아씨와 백서 어르신께서 계시기에
유성 형님이랑 단이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꼭 무탈히 돌아오겠습니다. 여기가 바로 저희 집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눈부신 푸른 숲으로 말을 몰아 사라졌다.
그날 이후,
산길에 남은 말발굽 자국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소식은 곧 끊겼다.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났다.
전쟁이 승전으로 끝났다는 기별은 들려왔으나,
윤재와 막동이에 관한 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동안 서화는 단 한 번도 대문 앞 등불을 꺼뜨린 적이 없었다.
바람이 몰아치면 외투를 여미고 나가 흔들리는 불꽃을 감쌌다.
밤에도 문을 잠가 본 적이 없었다.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도록, 늘 열어두었다.
아침이면 길가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가 두리번거렸고,
낮에는 바느질을 멈추고 대문을 응시했다.
저녁노을이 산등성이 너머로 깔리는 시간에는 꼭 문 앞에 서서
한참을 서성이곤 했다.
별이 뜨고 달이 기울 때까지도 발길은
안으로 쉽게 돌아서지 않았다.
그렇게 2년 하고도 더 지났을까.
윤재와 서화가 첫 이별한 날과 같은 겨울이었다.
눈이 발목 위까지 쌓여 발이 푹푹 들어가 제대로 걷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서화는 그날도 어김없이 대문 밖을 서성거렸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피로 물들이며 꺼져 가던 때,
온몸을 파고드는 찬기가 그녀를 떨리게 했다.
입술은 파래지고 발가락은 감각이 둔해져 와도
쉬이 몸을 돌릴 수 없었다.
"아씨, 이제 그만 들어오셔유...
고뿔이라도 드시면 어쩌려고 그러신데유!"
연심의 걱정 어린 말도 귀에서 귀로 스쳐 지나갔을 뿐,
서화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
서화는 말을 하며 옷깃을 더 굳게 여몄다.
두 손을 비비며 입김으로 녹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 서화의 뒤에서 다시 연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께서 얼마나 많이 걱정하고 계신디...
아씨께서 계속 그러고 계시믄 당장 데리고 내려오라고 하
셨다니께유?! 안 그래도 내일 옥련 아주머니가
오신다고 하셨고 만유? 안되거써유, 지랑 당장 내일 내려가유!"
드디어 서화의 귓속에 박히는 말이었다.
옥련이 온다는 것은 단순히 안부를 물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익숙한 모습이 눈에 스쳤다.
그녀는 본능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눈발 사이로, 한 사내가 비틀거리며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낡은 갑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숨은 가쁘게 끊어졌다.
그러나 눈빛만은 분명했다.
“도련님...?”
서화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부서졌다.
사내가 입술을 떨며 대답했다.
“서화…”
시간이 멈춘 듯 적막이 흘렀다.
서화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귓속에서는 이명만이 울렸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 발, 두 발,
천천히 그를 향해 나아갔다.
이내 정신을 잃은 듯 눈 쌓인 비탈길을 내달렸다.
“도련님! 도련님!!"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사이를 내달리기는 쉽지 않았다.
눈물이 가득 차 시야는 흐릿했다.
결국 서화는 눈 위에 넘어졌다.
"아씨!!"
뒤에서 부르는 연심의 음성도 그녀를 멈출 수 없었다.
서화는 벌떡 일어나 다시 내달렸다.
그리고 곧 그에게 닿았다. 그녀가 닿자마자 그의 몸은
그대로 기울어 서화의 품에 안겼다.
서화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손이 떨리며 그의 가슴과 옆구리를 더듬었다.
손끝마다 묻어나는 따뜻한 피에,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실감이 났을까.
“도련님... 어... 어찌합니까?... 왜... 왜... 도련님께서 어, 어찌....”
윤재가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팔을 들어 서화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은 차갑고 무거웠다.
“울지 마십시오... 너무 늦게 와... 미안합니다.”
서화의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 위에 서화의 손이 포개졌다.
눈물에 젖은 얼굴을 윤재의 손에 비비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셔요...
이렇게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윤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막동이는... 같이 오지 못했소.”
서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예? 도련님... 그게 무슨..."
놀란 표정으로 윤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전장에서… 내 눈앞에서 쓰러졌소. 나를 살리려 하다...
그 아이가... 다... 내 잘못입니다. 내가 지키지 못했습니다...”
서화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무엇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윤재의 잘못이 아님을 알았기에,
할 수 있는 거라곤 막히는 숨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는 없었다.
윤재가 그런 서화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대를 만나 함께한 지 언 십삼 년이 흘렀습니다...
옆에서 평생을 함께 하고 싶는데...”
“평생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 할 것입니다.
언젠가 제게 도망가자 하셨지요? 예,
도련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갈 것입니다...
그러니 백서 어르신께 빨리 가야 합니다...
어르신이라면... 꼭..."
윤재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낭자를 처음 만난 그 가을은 왜 그리 짧았는지...
그래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늘 그렇듯 가을은 또 올 텐데.. 그대 혼자 맞이하게 해 미안합니다.”
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윤재의 숨결이 점점 짧아졌다.
그의 손이 서화의 뺨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서화는 그 손을 덥석 붙들어 가슴에 꼭 껴안고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됩니다. 도련님,
미안하다는 말도, 사모한다는 말도 못 했는데...
이렇게 가시면 저는 어찌합니까... 제발... 제발...
눈 좀 떠보시어요... 도련님..."
눈발이 소리 없이 내려와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 위로 흩날렸다.
대문 앞 등불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꺼지지 않았다.
멀리서 숲이 낮게 숨을 쉬었다.
그 순간, 서화의 울먹임이 기도가 되었다.
“잊으면 안 돼요. 우리 혹 다음 세상이 있다면...
다시 만나기로 해요. 꼭이에요...”
가을은 가혹하게도 찰나의 설렘을 남기고 겨울을 맞이했다.
윤재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온몸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처럼, 숨은 목에 걸리고,
생각은 희미해졌다. 그러다 — 모든 소리가 멎었다.
세상도, 그녀도, 자신조차도 사라지는 듯한 고요 속에서 딱 하나,
그녀의 마지막 울먹임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나는 꼭 기억할 거예요. 당신은 잊어도 돼요.
내가 기억할게요...”
그리고 그는, 그녀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밤, 등불은 끝내 꺼지지 않았다.
바람이 몇 번이고 불꽃을 흔들었으나,
불씨는 다시 일어섰다.
눈은 잠시 그 위에 내려앉았다가 금세 녹아내렸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은 겨울의 심장처럼 오래 뛰었다. 돌고 도는 계절 마다 다른 바람의 향기 처럼
끝날듯 끝나지 않는...
그동안 <그리하여, 인연> 을 사랑해주신
많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 연재다 보니 부족한 부분이 굉장히
많았을텐데 끝까지 같이 달려와 주셔서
굉장한 힘을 얻었습니다!
다음에는 더 좋은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2주 정도의 공백기를 갖고
10월 14일 <청포리- 윤슬에 담긴 그리움> 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80년대 어촌 마을 배경으로 따뜻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글이 될거예요!
많은 기대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