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마을의 문을 두드리다.

가정방문

by 붕어예요

하루에도 몇 번씩 밀물과 썰물이 바뀌듯,
청포리의 바람도 조금씩 결이 달라졌다.
교실 앞 느티나무 그늘은 점점 짙어졌고,
햇살은 여전히 교정의 모래바닥을 뜨겁게 달궜다.
도현은 이제 아이들 이름을 틀리지 않았다.
덕배가 장난을 치면 고개를 저으며 웃었고,
옥순이 조용히 교과서를 펴면
그 눈빛에서 묵직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아이들도 더 이상 ‘서울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이젠 모두 그냥 “선생님”이었다.

“이 선생,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나?”

그날 오후, 교장선생님이 불러 세웠다.

“예, 괜찮습니다.”

“그럼 가정방문을 좀 하는 게 어떻겠나.
마을 분들이 서울서 오신 선생님을 많이 궁금해하더군.”

“아이들한테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그래. 아이들도 좋아할 거야.
덕배네가 마을 초입이니까, 거기부터 들리게.”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손끝엔 아직도 희미한 분필가루가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수업이 끝나자, 덕배가 소리쳤다.

“야야!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신댜, 토요일에!”

경자가 눈을 크게 떴다.

“진짜루? 우리 엄마 지금부터 청소하겄네.”

석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리 엄만 별로 안 좋아하실 건디. 바쁘다구...”

옥순은 그 대화를 조용히 들었다.
괜히 마음이 분주해졌다.
엄마는 부엌을 닦고, 아버지는 고무신을 말리겠지.
선생님이 집에 오신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토요일 오후,
바다는 이미 짠내로 달궈져 있었다.
태양은 느릿하게 기울었지만 열기는 식지 않았다.
도현은 흰 셔츠 소매를 걷고 흙길을 걸었다.

어디선가 라디오에서 트로트가 흘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상회집 간판이었다.

문을 열자 낡은 방충망 너머로
기름과 비누, 먼지, 그리고 바다 냄새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쇠뚜껑이 맞부딪히는 소리,
케로신 램프의 희미한 등유 냄새,
오래된 나무 진열대엔 과자와 생필품,
몇 가지 학용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모든 냄새가 묘하게 따뜻했다.
마치 ‘청포리의 오후’가 그대로 그 안에 갇혀 있는 듯했다.

“아이고, 선생님 어서 오셔유. 서울서 오셨다면서유?”

덕배 어머니가 앞치마를 털며 반겼다.

“덕배가 선생님 속 안 썩이는지 모르겄고만유.”

“아닙니다. 덕배가 얼마나 씩씩한지 모릅니다.”

“그놈이 말썽이 많아유. 그래두 심성은 착한 앤께
잘 좀 봐주셔유.”

“그럼요. 그게 또 덕배만의 장점이죠.”

덕배가 얼른 달려왔다.

“선생님, 이거 사이다여유. 시원허게 한 잔 드셔유.”

병뚜껑이 ‘칙’ 소리를 냈다.
차가운 단내가 목을 스쳤고,
라디오 속에서 조용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못찾겠다, 꾀꼬리—”


덕배는 흥에 겨워 따라 부르다 머쓱하게 웃었다.
문을 나설 때, 어머니가 물었다.

“마을 다 돌아보실 거래유?”

도현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그럴까 합니다. 덕배 어머님, 또 뵙겠습니다.”

길은 비탈을 따라 천천히 이어졌다.
발아래 모래가 사각거렸고,
바람 사이로 생선 말리는 냄새가 묻어났다.
지붕마다 햇빛이 내려앉은 오후,
그늘 속에선 파리채가 ‘휙’ 소리를 냈다.
경자네 집은 멀리서도 단정했다.
마당 앞까지 말끔하게 빗질이 되어 있었고,
문 옆에는 ‘청포리 어촌계장’이라는 명패가 반짝였다.

“어서 오셔유, 선생님. 더운데 고생하시네유.”

경자의 어머니가 단정히 차려입고 나왔다.

“경자가 책을 참 열심히 읽더라고요.”

“야, 그럴 거 고만유.
갸가 누굴 닮았는지 책을 그리 좋아하더라구유.”

경자는 마루 끝에 조심스레 서 있었다.

“저희 아버진 읍내에 잠깐 나가셨고만유.
아마 오늘 마지막 배로 들어오실 거네유.”

“그러셨구나. 그럼 어촌계장님께는
나중에 다시 인사드려야겠네.”

“야, 아버지께 그리 말씀 드릴게유.”

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선생님은 그만 가볼게,

월요일에 학교에서 보자.”

경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이 그녀의 머리카락 위로 부서졌다.
도현은 그 빛을 따라 한참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마을 끝 언덕을 오르자
감나무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대문에 다다랐을 무렵,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한쪽 발로
땅을 툭툭 차는 영수였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영수야.”

“선생님…?”

“왜 나와 있니? 선생님 기다린 거야?”

영수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곧 대문이 열리고 외할머니가 나왔다.

“할머님, 안녕하세요. 영수 담임 이도현입니다.”

“아이고, 선생님 이 먼 데까지 오시기 힘드셨을 텐디.
어여 들어오셔유.”

작은 마루에 걸터앉자,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 한 잔이 내어졌다.

“드릴 게 없네유... 이거라도 시원하게 잡수셔유.”

“예, 감사합니다.
아, 영수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야, 참말로 다행이쥬. 그래도
지 어무이, 아부지가 많이 보고 싶을 텐디도
내색도 안 허고... 저 어린것이 속이 속이겄어유.”

할머니가 눈물을 훔쳤다.
도현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때 영수가 연을 내밀었다.

“선생님, 이거 지난주에 찢어졌어요.
서울서 내려올 때 엄마가 사주신 건데...”

“저런, 속상했겠구나. 영수야, 괜찮으면 선생님이
좀 빌려가도 될까? 고쳐볼게.”

영수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저녁노을이 마을을 덮었다.
붉은빛이 지붕마다 번지고,
골목 끝마다 밥 짓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도현은 마지막 남은 집,
마을 안쪽의 오래된 집으로 향했다.
그곳엔 옥순이 살고 있었다.
세 아이의 웃음소리가 마당 안에서 들려왔다.

“어무이, 나 이거 다 씻었어!”

“그랴, 물 좀 퍼올라. 오늘 저녁엔 된장찌개 끓일 거고만.”

대문 앞에 선 도현을 보고
옥순이 가장 먼저 달려 나왔다.

“선생님!”

“그래, 옥순아. 네가 제일 먼저 맞이해 주는구나.”

옥순의 어머니가 뒤따라 나왔다.

“아이고, 선생님 오셨구만유.
집이 좁아서 앉을 데도 없는디...
지송 해서 우짠데유.”

“괜찮습니다. 그냥 인사만 드리러 왔어요.”

어머니는 흙 묻은 손을 훔치며 웃었다.

“우리 옥순이가 학교 가는 재미로 살어유.
동생들 밥도 챙기고, 참 야무져유.”

“그렇더군요. 수업시간에도 늘 조용히 집중하더라고요.”

“그 애가... 집 맏이라, 철이 일찍 들었어유.”

잠시 바람이 불었다.
장독대 뚜껑이 덜컥거리고,
지붕 끝이 살짝 흔들렸다.
옥순은 마당 한쪽에서 작두펌프 손잡이를
위아래로 흔들어 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덕배가 선물로 준
사이다병이 반쯤 비어 있었다.
도현은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휴, 선생님 살펴가셔유.”

문을 나설 때, 옥순이 조용히 불렀다.

“선생님.”

“응?”

“오늘 와주셔서 감사하고만유.”

도현은 잠시 멈춰서 미소 지었다.

“나도 고맙다, 옥순아.”

언덕을 내려오며 그는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그날, 교실 문을 닫으려던 늦은 오후였다.
석호가 조심스레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내일 가정방문 하신다면서유?
저희 집은 안 오셔도 돼유.”

도현은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어머니 안 계시니?”

“야. 내일 읍내 장날이라서
아침부터 나가셔서 밤늦게나 오실 거여유.”

그 말은 어딘가 어색했지만
도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다음에 기회 되면 가마.”

“야.”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뒤에 붙은 침묵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지금 생각하니,
석호의 눈빛엔 ‘부탁’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바다 바람처럼 하루 종일 마음을 스쳤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멀리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붉게 물들었던 바다가 어느새 깜깜한 밤으로 잠겨 들었다.

갯바람이 볼을 스쳤다.
도현은 손끝을 들어 바람을 느꼈다.
저녁빛에 물든 마을은 평화로웠지만,
어딘가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창 하나가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도현은 바다에 비친 달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