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독수리 오 형제

겨울새의 날개

by 붕어예요

눈이 밤새 그쳤는지
지붕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아침마다 늘 듣던 소리를 냈다.

덕배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상회 문을 조용히 닫고 나오면서
괜히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아직 아무도 깨지 않은 시간이었다.

영수네 집 앞에 도착한 덕배는
대문 옆에 서서
운동화 끝으로 땅을 긁적였다.
오늘 아침 일찍 나온 이유는 하나였다.
팔이 불편한 영수의 책가방을
대신 들어주려고.

잠시 뒤,
끼익—
대문 여는 소리가 났다.
덕배는 고개를 들었다.

“어?”

그 소리와 거의 동시에
골목 반대편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 덕배 아녀?”

석호였다.
어제보다 조금 느린 걸음이었다.

“이렇게 일찍 웬일이여?”

덕배가 묻자
석호는 잠깐 말문이 막힌 얼굴로 서 있다가
괜히 고개를 휙 돌렸다.

“그냥... 같이 가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석호 손에도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때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 뭐여~ 니들 짰지?”

옥순이였다.
그리고 그 뒤로 경자도 보였다.

약속한 적도 없고 부른 적도 없는데
영수네 집 앞에는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덕배는 잠시 멀뚱히 서서
그 얼굴들을 번갈아 보았다.

“야... 다들 영수랑 핵교 갈라고 온 거여?”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얼굴만 힐끗힐끗 볼뿐이었다.

그 순간,
끼익—
영수네 대문이 마침내 열렸다.
영수가 나오자마자
황당한 풍경이 펼쳐졌다.
아이들이 죄다
자기 집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들... 뭐야? 언제 왔어?”

놀란 눈으로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덕배가 영수 손에 들린 책가방을
덥석 집어 들었다.

“영수야, 내가 들어줄게.”

그러자 옆에 있던 옥순이가
이번엔 신발주머니를 낚아채며 말했다.

“그람 이건 내가 들지 뭐~”

씨익 웃어 보였다.
영수는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막상 손이 비워지자
괜히 어깨가 조금 펴졌다.

그렇게 독수리 다섯 형제 같은 아이들은
서로의 날개가 되어 느리지만 나란히
겨울 아침 길을 걸어 학교 쪽으로 향했다.

1교시가 끝나자
종소리가 길게 울렸다.
아이들은 책을 덮고
연필을 굴리고
의자를 끌며 웅성거렸다.

영수는 책상에 앉은 채
팔에 감긴 깁스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괜히 책 모서리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교실 문이 열렸다.

“오영수.”

선생님이었다.

“잠깐 교무실로 오자.”

교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아이들 시선이
자연스럽게 영수에게 쏠렸다.

영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덕배를 한 번 힐끗 봤다.
덕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교무실은
교실보다 훨씬 조용했다.
라디오 소리도 없고
아이들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의자 하나를 끌어당겼다.

“여기 앉아.”

영수는 조심스레 앉았다.
깁스를 한 팔이 괜히 어색해
몸을 살짝 비틀었다.
선생님은
영수 팔을 한 번 바라보고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팔은... 괜찮니?”

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조금 늦은 대답이었다.
선생님은
서류 위에 올려둔 연필을 굴리다가
말을 이었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학교로 전화 주셨어.”

영수의 손가락이
깁스 끝을 꽉 움켜쥐었다.

“오늘 오후 배로 들어오신대.”

그 말이 떨어진 뒤
교무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보통 같았으면
‘엄마’라는 말에
아이 얼굴부터 먼저 풀렸을 텐데
영수는 그렇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고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선생님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영수야?”

그제야 영수가
아주 작게 대답했다.

“... 네.”

“어머니 오신다는데 기쁘지 않니?”


영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무실 창밖으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눈이 살짝 녹아서
땅은 질척거리고 있었다.

“... 괜찮아요.”

그 말은
괜찮다는 말 같지 않았다.
선생님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수업 끝나면 바로 집에 가렴.”

영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네.”

문을 나서기 직전
선생님이 한마디 더 했다.

“영수야.”

영수가 돌아보았다.


“혹시,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영수는
잠깐 입술을 깨물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교무실 문이 닫혔다.
복도로 나온 영수는
잠깐 서 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교실 안에서 새어 나왔지만
그 소리가
오늘은 조금 멀게 느껴졌다.

‘엄마가 온다’는 말이
가슴 안에서
천천히,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영수는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
깁스를 한 팔을
다른 손으로 살짝 감싸 쥐었다.

어렵게 병원에 도착했던 어제
병원 복도 끝,
사람 그림자도 드문 곳에
공중전화 하나가 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영수를 대기실 의자에 앉혀 놓고
전화기 앞으로 갔다.

“영수야, 여기 가만히 있어라. 할매 금방 온다.”

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깁스를 한 팔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전화기 쪽을 멀뚱히 바라봤다.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
수화기를 드는 소리,
그리고—

“여보시오... 그, 선정이냐?”

'선정' 바로 영수 엄마였다.
할머니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수화기 너머에서
갑자기 소리가 커졌다.
너무 커서
영수 자리까지
뚜렷하게 들릴 만큼.

“아니, 엄마는 도대체 애를 어떻게 봤길래
애가 팔이 다쳐요?!”

영수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꼭 움켜쥐었다.


할머니는 영수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수화기를 더 바짝 귀에 붙였다.

“아이고, 그게... 미안혀...

친구들하고 썰매를 타다가...”

“아니 엄마, 썰매도 안 타본 애를
그렇게 하면 어떡하냐고요!”

엄마의 말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수화기 너머의 소리는
마치 벽을 치듯 튀어나와
병원 복도를 울렸다.

“내가 몇 번을 말했어요. 애 혼자 두지 말라고!”

영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본인 얘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휴, 내가 못살아 진짜!”

그 말에
할머니 쪽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만혀라... 애기 다 듣는다...”

할머니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내가 데려올게요.
이제 더는 못 맡기겠어요.”

그 말에 영수의 숨이 턱, 막혔다.

할머니는
수화기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한참을 말하지 못했다.

영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벽 뒤에 몸을 숨겼다.
엄마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떤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귀에서는

웅—
하는 소리만 났다.

어젯밤,
영수는 팔이 아픈 것보단
그 목소리가 더 무서웠다.
그래서였다.

오늘 선생님이
“어머니가 오신다”라고 말했을 때
영수는 기뻐하지 못했던 이유.
그렇게 가고 싶었던 서울.
그렇게 보고 싶었던 엄마였는데
오늘은 왠지 가슴 한켠이 쿠욱 쑤셔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