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기다림

그래도 기다렸던 마음을 알긴 할까요?

by 붕어예요

덕배네 상회 앞에서
아이들은 늘 그랬듯이 한 번 더 멈춰 섰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 어느 집으로 가든 이 상회 앞을 그냥 지나친 적은 없었다.


“나 간다잉—”


덕배가 상회 문 앞에서 손을 흔들자
아이들도 하나둘 손을 흔들었다.


“덕배야, 낼 봐~”


“숙제 잊지 말고 혀~!”


늘 있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때—
상회 문이 덜컹 열리며
누군가 급하게 나왔다.


“영수야!”


영수 할머니였다.
숨이 약간 가쁜 얼굴이었고
두 뺨이 눈에 띄게 상기돼 있었다.


“할머니?”


영수가 고개를 들자
할머니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아이고, 내 새끼~ 핵교 마쳤냐?”


“네.”


"할머니 안녕하셔유~!"


아이들은 인사를 한 뒤 서로 눈치를 보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그럼 우리 먼저 간다이!”


옥순이가 말하자
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낼 봐.”


아이들이 골목 아래로 흩어지고
영수와 할머니만 남았다.
할머니는 영수 손목을 가볍게 붙잡고
집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겨울바람이 차가웠지만
할머니 걸음은 유난히 가벼워 보였다.


영수는
할머니 얼굴을 슬쩍 올려다봤다.
웃고는 계신데, 웃음 사이사이에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엄마가 오는 걸 모르시나 보다...’


그 생각이 스치자
영수 가슴이 조금 조여 왔다.


“할머니.”


“응?”


“오늘... 뭐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할머니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휴, 그걸 어떻게 알았냐~ 니 삼촌 말이다.”


영수는 걸음을 멈췄다.


“삼촌이 왜요?”


“전에 그 처자 있잖여. 결혼 날짜를 잡았댜.”


“아...!”


“봄에 식 올린다는디. 그전에 마을 잔치도 해야 하고, 아휴, 일이 산더미여.”


할머니는
말을 하면서도
벌써 머릿속이 바쁜 얼굴이었다.


“쌀은 얼마나 해야 하나, 국수는 어디서 삶아야 하나, 동네 사람들 다 불러야지...”


그 들뜬 목소리 옆에서
영수는 괜히 발끝만 내려다봤다.
기쁘긴 했다.
삼촌이 결혼한다는 것도, 할머니가 저렇게 웃는 것도.


그런데
오늘은 그 기쁨이
온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가 오면...’


그 생각이
계속 마음을 건드렸다.
집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
서둘러 저녁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영수는 가방을 내려놓고도
한동안 마루에 서 있었다.


“영수야, 언능 씻고 숙제부터 허고 있어”


영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괜히 대문 쪽을 한 번 더 바라봤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이었고,
골목 끝은 어둑해질락 말락 했다.


집 앞에는
아직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배 들어오는 소리도,
사람들 웅성거림도.

영수는 평소엔 대충 벗어두던 신발을
괜히 코를 맞춰 놓았다.


방에 들어와서도
영수는 책을 펴지 않았다.
대신 창문 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바깥소리를 들었다.
바람 소리,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누군가 대문 여닫는 소리.
그때마다
영수는 고개를 들었다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다시 숙였다.


그렇게 해가 다 지고
저녁상이 차려질 때까지도
결국 엄마는 오지 않았다.


할머니와 영수는
마주 앉아 조용히 밥을 먹었다.
숟가락 소리만
부엌에 작게 울렸다.
한 그릇을 거의 비웠을 즈음
영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머니.”


“응?”


“오늘 학교로 전화가 왔었는데 엄마가 오늘 오후 배로 들어온다고 했었어요...”


할머니 손이 잠깐 멈췄다.
할머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 그려~?”


네, 그런데 안 오시려나 봐요.”


영수는
그 말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어딘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엄마가 안오길 바랬었는데

그게 아니었을지도...


할머니는
영수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아무 말 없이
국을 한 숟갈 더 떠 주었다.


“회사 일이 바빠서 못 왔겄지~ 아무 생각 말고 어여 묵어.”


영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


아휴... 왜 아니겄냐 맡겨논 자식이 다쳤다는디 진즉 와보지도 못 허는 니 어매 심정이 어쩔 것이여.”


할머니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영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괜히 깁스를 한 팔을
살짝 만졌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도 같고,
조금 더 복잡해진 것도 같았다.
‘안 와서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왠지 미안해서.


그날 밤,
영수는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오래 바라봤다.
엄마도, 삼촌 결혼도,
할머니의 웃는 얼굴도
모두 한꺼번에 떠올랐다.


청포리의 밤은 조용했고
아직 겨울 냄새가 남아 있었다.
영수는 이불속에서
깁스를 한 팔을 몸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오늘 하루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마음은 종일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