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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Nov 26. 2021

백 년 된 집

“좀 불편할 거야.”

 남편의 짤막한 말투에서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인사차 시집 식구들을 뵈러 대구에 가게 되었다. 시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도와주셨지만, 식구들이 낯설어 솔직히 긴장의 연속이었다. 시아버님은 이북출신이고 시어머님은 십 남매 중 막내였다. 어머님은 부모님 같은 다른 형제자매들의 손에서 밝게 성장하셨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두 분 다 외롭고 어렵게 사셨던 것이 분명한데 더 오래 사셨으면 좋았으련만 남겨진 가족들만이 슬픔을 간직한 채 열심히 살고 있었다. 

 

 대구는 어머님이 태어난 곳으로 중학교까지 외삼촌 댁에 있다가 시내에 있는 둘째 언니 집에서 꿈에 바라던 의대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그때의 일은 남겨진 낡은 사진에서 본 적이 있다. 형편이 되는 형제자매들이 학비는 물론이고 옷차림까지 신경 써 주셨는지 사진마다 몸에 꼭 맞는 정장들이 요즘 유행하는 옷보다 예쁘고 세련돼 보였다. 그만큼 가족들의 사랑과 지원이 컸다는 것이겠지. 우리를 챙기시는 이모님들의 정성에도 그런 곰살맞은 면이 있었다.

  시이모님은 어머님의 둘째 언니로 나이가 스무 살이나 위였다. 대구에 내려온 김에 하룻밤 자고 가라 했다. 그러나 그런 만남과 장소가 너무 특별했기에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시이모님과 그 집에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듯한 삶의 방식들이 고스란히 남아, 과거와 현재를 향기롭게 이어주었고 그것이 미래의 밝은 희망으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 시내 한복판에 있었던 그 집은 백 년 된 집이었다. 시집와서 단 한 번도 이사한 적이 없었고, 거기에 사는 이모님 부부도 백 살에 가까운 나이이심에도 백 년 된 집의 이미지와 같이 정정하셨다. 요즘같이 아파트생활이 익숙해진 나에게는 왠지 모르게 낯설기는 하지만 오길 잘했다 싶었다. 솔직히 나는 이런 집에서 꼭 한번 살아봤으면 했기에. 

 

 초인종을 찾아봤지만 아무리 봐도 없었다. 그래서 문 쪽을 보니 우리가 올 줄 알고 문을 이미 열어 놓으셨다. 그때 펼쳐진 광경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백 년 전의 것이었다. 그 집은 일본강점기 때 지어진 일본식 집이었다. 스르륵 열리는 미닫이식 현관과 방과 방이 연결되어있는 다다미 구조, 그리고 정원 쪽으로 길게 복도식 마루가 있었다. 손질이 되어있지 않은 정원에는 꽃 대신 파, 배추 등이 심겨있었다. 그러다 시선이 정원이 끝나는 곳에 멈추었다. 옆집에 해당하는 위치에 온통 높은 빌딩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빛을 많이 받을 수 없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정겨운 풍경이었다.

 

 옛날에는 이런 집이 부유한 집에 속했을 텐데, 토짓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매수하고 싶다는 주위의 압력에도 약간의 수리 외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유유한 자태가 이 집의 매력이다. 외국에서는 이런 집을 더 평가해준다는데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맞는지 이 집을 세상 속에서 지킨 이모님이 존경스러웠다.

 

 원래 깔끔한 분인지 도우미 아주머니가 좋은 분인지 집안에는 먼지 하나 없고, 음식도 두 상으로 나뉘어 보기 좋게 차려 나왔다. 반찬은 모두 남편이 평소에 잘 먹는 것들이라 ‘피는 못 속인다’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모습은 식사 후 꼭 커피를 드신다는 것이다. 안방 장식장에 너무 오래되어 투박하고 누렇게 퇴색된 아무 무늬도 없는 두툼한 커피잔과 커피 받침대를 꺼내셔서 말이다. 평소에 나는 귀찮아서 머그잔에다 마시는 것이 고작인데 작은 정성이 이렇게 사치스러울 정도로 풍부하게 느껴지다니. 

“이런 것이 멋이라는 것일까?”

 그 시대에는 이런 스타일이 신세대 스타일이었을 텐데, 약간의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느 시절의 가장 행복했던 시점에 머물러 있으려 하시는 것은 아닌지.”

 남편은 이런 것들이 불편할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무언가 의미가 있어 보여 마음이 찡해 왔다. 두 분 다 천생연분으로 오래 사시고 계시지만 지금 이 세상에 없는 큰아들과 우리 시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에서 그런 것은 아닌지······. 아니면 천국으로 가셨다는 확신 때문에 이 순간을 지키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신 두 분 모두 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꿈에 바라던 의사가 되었다. 그래서 슬픔보다는 꿈을 이루는 과정을 선사한 멋진 집이라는 점에서 비밀스러움이 곳곳에 숨어 있는 듯했다. 

 

 그 후 우리 부부에게는 금방 아이가 생겼고, 세 가족이 대구에 종종 찾아와 쉬어 가곤 한다. 그때마다 시이모님 부부가 할머니, 할아버지 역할을 해주신다. 백 년 된 집에서의 축복된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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