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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Nov 19. 2021

수첩

 여름의 녹음이 어느새 황갈색의 아름다운 단풍 길로 물들어 있었다. 이대로 가을이 겨울로 가는 참이었다. 매일 다니던 길이었는데 이런 변화를 알아주지 못했다니. 올가을은 이렇게 멋없이 지나버렸다. 작년만 해도 나뭇잎의 다양한 색깔에 매료되어 이 순간의 행복에 젖었고 일부러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오곤 했다. 옆에 같이 있어 주었던 벗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유독 가을날같이 낭만적인 옛 친구들의 미소를 떠올리며 커피 한잔을 벗 삼아 장바구니를 들고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 집으로 왔다.

   


 얼마 전 청소하다 발가락을 다쳐서 한동안 움직임이 둔했었다. 그러다 보니 정신이 온통 발가락에 쏠려 계절 가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아파보는 것도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것 같다. 내가 그동안 누렸던 건강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고, 발가락 정도만 다쳐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아플 때 도와주시는 의사 선생님이 계신다는 것도 감사했다. 발을 감싸주는 양말과 활동을 도와주는 신발도.



 그런데도 자주 걷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잔소리는 접어두고 올가을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던지 집 앞 오솔길을 걷고 또 걷고 싶어졌다. 올해는 다시 오지 않는다. 붙잡고 싶지만 담고 싶을 땐 수첩에 고이고이 적어 두련다. 오늘과 어제와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생각나게 될 것이다.

   


 수첩을 쓰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수집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한 권 두 권 쌓인 것이 꽤 된다. 몇 년 전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전자수첩으로 바꾸어 보려고도 했으나 익숙하지 않아 금방 포기해 버렸다. 수북이 쌓인 옛날 수첩들이 가을날의 낙엽처럼 뒹굴고 있는 것 같아 버리려고도 해 보았다. 그런데 옛 수첩을 펼치는 순간 써 놓고 읽어보지 않은 보석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옛 기억의 현장으로 내 마음을 데려다주었다. 연락이 안 되거나 이미 세상에 안 계신 분과의 약속이 적혀 있기도 했다. 그런데 수첩 안에서는 그때의 그 순간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아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이 영상을 남기고 글이나 시가 순간의 감정을 만들어 남긴다면 수첩에 적힌 것들은 과거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지금은 없어진 과거의 마음이라 나의 것이지만 조심스럽다. 나를 지켜 준 마음들이기에. 

   


 작년에는 아는 문우가 수첩을 선물해 주었는데 올해는 답례품으로 수첩을 받았다. 마침 수첩을 사려고 한 이 계절에 그것도 내가 그동안 애용했던 제품이었다. 나를 잘 알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주었을까? 나에게서 수첩을 잘 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나 상대방이 그런 유형인가 보다. 사람이 준 것이지만 이럴 땐 하나님이 특별히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여기고 싶다. 작년에 이어 다가올 한 해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시어머님이 남기신 유품 가운데 수첩이 가장 많다. 작은 것들로 1~2박스 정도 있었다. 남편과 나는 박스에 넣어 간직하기로 했고 언젠가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수첩을 다시 정리해 보자고 했다. 그러다 미국에 계시는 형님이 갖고 가 버려 지금은 없다. 아마도 어머님이 그리울 때마다 수첩을 읽으시겠지. 실은 나도 살짝 읽어 본 것은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머님이 본인의 수첩을 다른 사람이 읽어 보리라 상상도 못 했을 텐데 나까지 보게 되어 이상한 기분이다. 그래서 나도 수첩을 쓸 때는 누군가가 읽어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려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터치 하나로 지워지는 전자수첩보다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수첩이 좋다. 비록 지우고 싶은 페이지가 수첩에 남아 있을지라도.

   


 훗날 발가락이 다 낫지 않아 시큰거리며 아파 2022년 가을날 낙엽을 밟으며 오솔길을 걸었던 것을 수첩에서 발견하면 새삼스러울 것 같다. 12월의 새로운 페이지에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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