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의 비를 마시는 법

비와 커피로 완성되는 도시의 감각

by Mansongyee
file_00000000cd7871fd903c791db5b4c998~2.png 무채색의 창밖 회색과 내 손안에 담긴 짙은 갈색의 안도감



나는 이 도시가 단순히 비를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수족관처럼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고 상상한다.


비가 깊어질수록 숲은 더 짙은 초록을 뿜어내고
이끼는 더 폭신해진다. 압도적인 생명력 앞에서 경외감을 느낄 때면,

나는 그 안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창문


지금 나는 커다란 창가에 앉아 밴쿠버의 비를 보고 있다.
창밖에서는 한 행인이 후드티를 머리까지 끌어올린 채
비를 피해 서둘러 뛰어간다.



기억


25년 전, 밴쿠버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비는 지금보다 훨씬 미세했다.
공기 속에 스며들 듯 살결에 먼저 닿던 비.
젖고 있다는 사실을 이성이 알기 전에
몸이 먼저 알아차리던 비였다.


비가 내린다는 현상보다 공기의 질감이 달라졌다는 감각이 먼저 기억에 남았다.


그 시절에는 우산을 들거나
비 때문에 뛰는 사람을 보기 드물었다.
우산을 쓰지 않고 걷는 사람들의
젖은 어깨 뒷모습은 포기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가장 부드러운 순응의 태도였다.


하지만 요즘의 비는 때때로 날개를 펼치듯
도시 위로 더 크게, 더 거칠게 내려앉는다.
비의 모습이 달라졌고, 그에 맞춰
비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이제는 젖기 전에 건너가고, 머무르기보다
통과하려는 움직임이 더 많아졌다.



커피


큰 창 너머, 시멘트 바닥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나는 여전히 보고 있다.
소리는 크지 않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무게가 담겨 있다.

이때 커피는 이 고요한 향연의 유일한 동반자가 된다.


밴쿠버를 물과 커피의 도시라 부른다.
비와 안개로 모든 것이 흐릿해질수록,
이 도시에서는 오히려 뜨거운 잔 하나가
사람을 자기 자리로 불러온다.


이 강제된 고립은 외로움이 아니라, 소음 없는 내면으로
침잠하기 위한 가장 고요한 초대장이다.


야외 활동은 제약받지만 커피 한 잔을 앞에 두면
그 시간은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 읽고, 쓰고,

생각하는 조용한 생산의 시간으로 변모한다.


비를 피해 들어온 실내에서
두 손으로 커피 잔을 감싸 쥔다.
비라는 외부의 습기에 맞서 내 몸 안에 채워 넣는
내부의 온기.


컵을 감싼 손바닥으로 열기가 천천히 스며들 때,
젖은 외투 속에 남아 있던 냉기가 비로소 풀린다.
첫 모금을 넘길 때 몸이 느끼는 그 안도감.



사색


비 냄새가 흙내음으로 올라오고,
갓 볶은 원두 향이 공기와 섞일 때
밴쿠버의 공기는 비로소 완성된다.


무채색의 창밖 회색과 내 손안에 담긴 짙은 갈색.
이 시각적 대비가 주는 안도감이 밴쿠버 카페 문화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비가 내리는 속도와 커피가 식어가는 속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사색은 비로소
날개를 편다.



초록


이곳의 초록이 그토록 지독하게 선명한 이유는
여섯 달에 걸친 묵묵한 젖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빛이 아니라,

견뎌낸 습기 속에서 완성된다.


그래서 나는 이 축축한 계절의 도시를 기어이
사랑하고 만다.




이 비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말을 덜어내는 대신
몇 개의 소리를 곁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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