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나는 깊이가 부족했고

지금의 나는 언어가 부족하다

by Mansongyee



드라마를 본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온 주인공에게

필요한 걸 정확히 집어내고,

추천도 잘하고,

끼워 팔기까지 능숙한

드라마 속 총각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 시절 알고 지내던 서점 주인이 떠올랐다.


이민 오기 전까지 나는 서점에 가서

책을 둘러보는 걸 취미처럼 했다.

서점을 좋아했다.

책이 좋았다.

그냥 좋았다.


다만,

읽는 데 그만큼 열심이진 않았다.

제목을 훑고,

신간을 구경하고,

맘에 드는 책을 집어 몇 쪽 읽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내 손길을 기다리는 책들이

풍성하게 쌓여 있다는 것,

그래서 서점은 충분히 좋은 곳이었다.


돌아올 때는

서점 주인은 늘 책을 몇 권 골라 내 앞에 놓는다.


“이건 당신 취향이에요.”

나는 그녀의 성의를 물리치지 못해

못 이기는 척 책을 사 오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꽤 웃긴 일이다.

어쩌면 내 취향을 잘 알았던 게 아니라,

드라마 속 총각처럼

그분의 직업의식이 대단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 시절 우리 집 거실에는

TV 대신 책이 가득했다.

덕분에 겉보기엔 제법 ‘책 읽는 집’ 같았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그 많은 책을 곁에 두고도

왜 그리 열심히 읽지 못했을까.

인생이 참 바빴던 걸까.


세월이 흘러 이곳에서도

나는 여전히 가끔 서점으로 놀러 간다.

취미는 변하지 않았다.

그곳에 서 있으면 그냥 좋다.

다만 이제는 짐작하기 어려운

외국어 책들 앞에 서서

홍보 문구만 읽는 사람이 되었다.


‘뉴욕타임스 1위’, ‘전 세계 100만 부’.

겨우 이해되는 제목을 발견하면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부터 해본다.

하지만 정작 사 들고 올 책은 없다.


예전만큼 바쁘지도 않은데,

이곳의 책은 너무 비싸고

장식품이 될 걸 알기 때문이다.


필요 없는 물건에 탐내지 않는 내공이

생긴 덕분이기도 하다.


책 향기만으로 만족하는 서점 나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점이 좋다.

너무 좋다.



젊은 날의 나는

깊이가 부족했고,


지금의 나는

언어가 부족하다.



시시때때로 부족한 인생이라

늘 책 옆에 머물지만

정작 그 속에 흠뻑 젖지는 못한다.


그래도 뭐 어떤가.

서점이 좋았고,

책을 좋아했고,

책을 읽는 행위보다

책의 향기를 더 사랑했음을

기쁘게 고백한다.



책 옆에서는 오래 살았는데,

책 속으로 이사 가기엔

아직 준비물이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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