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책이 남긴 것

박웅현 『여덟 단어』를 떠올리며

by Mansongyee



3년 전, 맨체스터에 사는 딸이 아이를 낳았다.
나는 친정엄마로서의 ‘공식 출장’을

떠나는 마음으로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객지에서 오래 버텨 온 딸과,

처가가 멀어 장모밥을 자주 먹지 못했던

사위를 떠올리며

‘가서 맛있는 것 마음껏 해줘야지’
그 다짐 하나를 품고 갔다.


손자는 천사처럼 순했고,
딸과 사위는 이미 생활의 리듬을

완벽하게 맞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내 손은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딸과 함께,

아주 오랜만에 온전히 쉬는 시간을 얻었다.
돌아온 뒤 나는 한동안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힐링 제대로 하고 왔다”고 했다.


딸은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맨체스터에서 어느 날,
내 스마트폰에 전자책 플랫폼을

조용히 설치해 주었다.


처음 앱을 열었을 때,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젊은 시절에도 책을 많이 읽고 싶었다.
그러나 환경과 성격, 이민 생활의 긴장 속에서
그 마음은 늘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만 남아 있었다.


돌아보면 그 시절의 독서 열망은
어쩌면 ‘가짜 열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이가 들며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였을까.
휴대폰 속 작은 아이콘 하나가
다시 진짜 열망을 깨웠다.


책들이
나를 가까이 부르는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딸에게서
내 열정의 열쇠 하나를 건네받았다.
어떤 가르침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맨체스터에서의 40일을 기점으로
나는 책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핸드폰 하나면 충분했다.
어디서든, 언제든
눈에 들어오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백내장 수술로 잠시 멈춰야 했지만
독서는 여전히 내 위안이자 기쁨이었다.


그리고 오늘,
문득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
당시 나는 읽은 뒤 메모지에 이렇게 남겼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
자기를 존중하는 자세,
본질을 향해 질문하는 시선.
한 문장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책.
꼭 다시 읽고 싶은 책.


나는 그 메모를 남기며
‘한 달 뒤 다시 읽어야지’라고 적어 두었다.

그 한 달이
어느새 3년이 되어 있었다.


오늘 다시 그 책을 찾았다.
그러나 전자책 플랫폼에서
그 책은 사라져 있었다.


예전에 스마트폰 문제가 생기며
다운로드했던 책들이 한 번 지워진 적이 있다.
그때는 다시 받으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책 자체가 플랫폼에서 내려간 듯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했다.
책 한 권이 사라졌을 뿐인데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책도 사라지고
플랫폼도 변한다.


그러나 그 책을 읽으며 느꼈던

열망과 감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딸이 건넨 작은 선물 하나로
나는 다시 책을 읽는 사람이 되었고
늦은 인생의 두 번째 계절을 시작했다.


나는 지금
나만의 세계를 천천히 되찾아가고 있다.


오늘, 사라진 책 한 권을 통해
다시 깨닫는다.
잘 읽은 책은
사라져도
마음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단순하고 담백한 사람이라고 믿었지만,
책 한 권의 부재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것도
조용히 알게 되었다




사라진 것은 책 한 권이었고

남은 것은 나를 다시 읽게 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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